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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8월31일 화요일 7 (제176호) 기 획 △총괄간사박창균010-8858-2783kywnn@naver.com △재무책임유사박병목010-6509-2047pbmok1206@naver.com △수단책임유사박병인010-380 4-2512pbin59@hanmail.net △편찬책임유사박정룡010-8599-3664park7493@hanmail.net 밀양박씨 규정공 후 참판공파 세보편찬 공고 밀양박씨참판공파종친회는지난4월17일(음3.7)정기총회세 보편찬결의에따라다음과같이세보편찬(전자족보)을추진 중에 있어 공고하오니 현종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으로 역사에 길 이 남을 훌륭한 족보를 만들 수 있도록 성원바랍니다. 특히 이번세보발행은마지막책족보가될수있어누보되는현종이없 도록하여주시기바랍니다. 뱚뱚뱚☆발간기준:1997년발행정축보 ☆수단접수기간 2021.7.1.~2021.12.31. 뱚뱚뱚☆수단접수처:대구광역시중구명륜동44-4대보사 전화053-256-9753fax053-254-4383 뱚편집위원회 뱚종친회장박종성010-8327-3334 편찬위원장박재균010-2522-2667 2021.07.01. 밀양박씨참판공파종친회회장박종성 세보편찬위원장박재균 뱚○수단접수요령:대보사홈페이지접수www.daebosa.co.kr(홈페이지배너참 조) 전남담양군창평면절산마을은함양박씨동정 공(휘 선) 후 월영당 이홍(以洪) 公의 후예 집성촌 으로 마을 입구에 충효문(忠孝門)있다. 이 충효문 은 지극한 효성과 충절을 보인 후손 4위의정려를 모신곳으로충효의가문임을알수있다. 월영당공의아버지 황산공(휘 수화)는 3세 효자 로 이름을 떨쳤고, 월영당공 또한 지극한 효성을 보여대대로 보여준 효자 집안으로 손자와 증손자 에이르러4명이효자정려를받았고,출가한여식 (女息)이열녀로서정려를받으니한가문에서5명 이 정려를 받은 것은 극히 드문 일이기에 소개해 본다. 충효문은 월영당공(휘 이홍)의 증손 휘 계업 (繼業)이 정유재란에 몸소 모친(母親)을 등에 업 고 산골짜기에 피신중 적병(賊兵)이 돌연히 몰아 오며 모친(母親)을 살해코자 하거늘 공(公)이 숲 속에서 뛰어나와 몸으로 가리다가 모자(母子)가 함께 피살 되어 인조(仁祖) 갑자(甲子, 1624)에 정려가 내려지고, 월영당의 손자 장경(長卿)과 인경(仁卿) 형제가 임진왜란에 권율장군 휘하에 서 공을 세우고,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효성이 알 려지면서 1643년 효자 정려가 내려져 그해 11월 전라도 감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평현령 방원량 (房元亮)으로 하여금 사행을 받들고 공사를 거행 함 으 로 서 우 뚝 서 게 되 어 신 재 공 휘 장 경 과 조 카 계업의정려를모시게되었다. 당시 신재공 휘 장경의 아우 치재공 휘 신경의 정려는 전남 보성군 벌교 본제(本第)에 건립되었 고, 이후 아들 참봉 광업(光業) 또한 1684년 효행 으로정려가내려졌다. 전남 보성 벌교와 담양 절산에 각기 정려문을 세우고 그 효행을 기리던 중 세월의 무게를 이기 지 못하고 쇄락하여 담양 절산의 정려는 1900년 (庚子)에 종손 재풍(在豊)과 더불어 종원들이 의 논하여 처음으로 보수하여 한곳에 모시자는 의사 를 발의하여 정성을 다하고 효도하는 마음으로 가재(家財)를 기울이고 힘을 다하여 밤낮을 가리 지 않고 게을리 아니함에 다음해 신축년(1901) 봄에 목수와 장인들의 노고에 힘입어 마을 앞 현 위치에 낙성하여 충효문정려(忠孝門旌閭)의 면 모가 새롭게 창건되고, 1946년 재 중수하여 지금 에 이른다. 충효문에는 사효자(四孝子) 정려 편 액과 정려기를 비롯 중수기, 이건기 등 4장의 기 문편액이걸려있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 절산마을 충효문의 사효일 열(四孝一烈)을 소개하기 전 월영당 휘 이홍과 공의 아버지 삼세효자(三歲孝子) 황산공 휘 수화 (遂 和 ) 공 의 효 행 을 먼 저 소 개 해 야 할 것 같 다 . 동정공(휘 선)의 차남 황산공 수화(遂和)는 세 종 기미년(1439년) 태어났다. 세 살 때 부친(동정 공 휘 선)상(喪)을 당하여 능히 냄새나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애통하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으 며, 장성하여서는 학문에 독실하고 행동에 근신 하며 모친(母親)에게 효도가 극진하고 진사(進 士)가 된 뒤에는 다시 벼슬하려고 않은 것은 모친 을 봉양하는데 구애될까 두려움이었다. 그 뒤 모 친(母親)상(喪)을 당할 때는공(公)또한노쇠하 여 집상(執喪)하기가 어려운데 여묘(廬墓)하여 3년을 지냈다. 공(公)의 인품이 강직하고 과감하 며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종족(宗族)에게 화목하며 붕우(朋友)에게 신의가 있으니 모두가 효도한마음에서나온것이다. 황산공의 아들 월영당공 휘 이홍(以洪)의 字는 사의(士毅), 월영(月影)은 아호이다. 학문이 뛰 어나 중종 정묘년(1507년) 생원(生員)이 되고 또 명경(明經,경서에 정통한 사람을 뽑는 과거)으로 급제하여 장차 세상에 크게 쓰이게 될 것인데 도 리 어 파 직 을 당 한 것 은 공 (公 )의 천 성 이 강 직 하 여 바른말을 하다가 간신들의 모함에 빠진 것이 다. 기묘년(1519년, 중종 14)에 천(薦)을 받아 과 거를 보인 것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건의(建議) 한 바요,용심순근 효제숙저(用心醇謹 孝悌夙著) 의 명목으로 천거하였으나 공(公)은 진취할 뜻이 없고,모친의 연로(年老)로서 사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 겨 울 에 사 화 (士 禍 ) 로 정 암 선 생 이 하 모 든 현인들이 화를 피하지 못하였고, 드디어 공 (公)에게도 미쳤다. 그러나 공(公)의 마음은 본 래 결백하므로 세상이 공(公)을 버리기 전에 공 (公)이 먼저 세상을 끊어버리고 월봉산으로 들어 가 숨었다. 산(山)은 창평고을 동쪽에 있는데 깊 숙하고 궁벽한 곳이다. 그때 백형 보옹공을 비롯 눌재 박상, 육봉 박우, 모재 김안국, 사재 김정국 등과 더불어 추중하니 이들이 곧 호남의 연주육 현이다. 공의 자품이 특수하고 행실 독실하며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효성이 지극하고 백씨(伯氏)에게 공손하며 지조가 담백 하고 일찍부터 구차하게 얻으려는 마음이 없었 다. 명경(明經)으로 강(講)하다가 글자 하나를 잊어버리고 외우지 못하다가 누차 반복하며 생각 한 뒤 에 알 게 되 었 다 . 공 (公 ) 은 스 스 로 물 러 나 고 자 하니 고관(考官·試官)이 허락지 않고 말하되 대개 강(講)하다가 있었더라도 스스로 해득하면 낙제(落第)되는 법이 없다 하거늘 공(公)은 오히 려 구차하게 얻음으로써 탓이 있을까 걱정이 되 었는데 뒤에 파삭(罷削)이 된즉 公의 지각은 또 한 자세한 것이다. 기묘년 현량과에 응시치 않은 것은 공의 뜻이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없으되 얼마 가 못되어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화가 하늘 에 뻗었은즉 공의 선견지명이 혹 여기에 있는 것 이 아 닌 가 싶 다 . 공의 효행은 백형 보덕공(諱 이관)으로 하여금 정사를 올바르게 펼칠 수 있도록 하였고, 기묘명 현으로서의행동은진실로앞을보는것같다. △효자박장경·인경(長卿·仁卿) 박장경(朴長卿)의 자는 계임(季任)이요 호는 신재(愼齋)요 아우 인경(仁卿)의 字는 숙임(叔 任), 호는 치재(恥齋)이고 군자감직장(軍資監 直 長,啓功郞)유신(惟新)의 아들이다. 형제쌍효(兄弟雙孝)로 세상에 알려졌다. 임진 왜란에 형제는 권율의 휘하에서 운량관(運糧官) 이 되어 공(功)을 세우므로 참봉에 제수되었고, 이 사실이 금산대첩비와 호남절의록에 전해지고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소재 조선오란충의사 충혼탑에형제의이름이나란히올랐다. 신재(愼齋) 公 장경(長卿)은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법도에 넘치도록 애통하며 죽(粥)을 마시 고 3년을 마쳤다. 일찍 고(孤, 아버지를 잃음)가 되어 효도를 다하지 못함을 한(恨)을 삼고 모친 에게 정성을 다하며 비록 가난하되 조석으로 공 양에는 빠진 것이 없고 모친(母親)께서 중풍으로 10여 년을 병석에 계시는데 공(公)은 잠깐이라도 곁을 떠나지 않고 음식은 반드시 몸소 받들며 약 (藥)도 반드시 몸소 다리고 기동 할 때에는 반드 시 몸소 부축하며 대소변의 기물도 또한 다른 사 람에게 부탁치 않고 자리에 누었을 때도 없으며 옷 을 입 으 면 띠 를 풀 지 못 한 때 가 혹 1 0 일 또 는 한 달도 되었다. 병환이 위급함에 상분(嘗糞)하여 그 길흉(吉凶)을 증험하고 임종(臨終) 할 때는 단지(斷指)하여 명한의 만분지일이라도 연장하 기를 바랐으며, 상(喪)을 당 하여는 통곡하다가 기절하여 거의 일어나지 못할 사람 같았고, 장사 한 뒤에는 여묘(廬墓)하며 조석으로 성묘하고 3 년 안에는 최질(衰 풩, 상중에 입는 삼베옷)을 벗 을 때가 없으며 채과(菜果)도 먹지 않고 곡(哭) 한 소리가 끊어지지 안했으며, 제복(除服)한 뒤 에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에 대한 말을 들 으면 문득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또한 감읍하 였다. 여묘할 때 겨울에 눈이 오면 성묘한 뒤에 반드 시 묘 역 을 쓸 고 아 무 리 피 로 하 되 빠 질 때 가 없 으 니 마을 사람들이 민망하게 여기며 이따금 먼저 가서쓸어준사람도있었다. 또 선산이 두 고을 사이에 있으므로 처음에는 탁탁(濯濯)하였는데 초동(樵童) 목수(牧 씌)들 이 그 효성에 감동되어 공(功)을 세우므로 참봉 을 제수 받았으되 부모가 계시지 않은 것으로써 응소(應召)치 않았다. 필선(弼善) 고부천(高傅 川)이 효자행(孝子行)과 선시(扇詩)를 지어주며 그 효성을 찬양 하였으며, 산수(山水) 간에서 고 반(考槃,은거하는집을이룸)그세상을마쳤다. 공의 생전에 여러 고을 유림들이 그 행의(行 誼)를 가려내 관(官)에 천문(薦聞)을 하였고, 몰 (歿)한 뒤에는 인조(仁祖) 계유년(癸酉,1633)에 는 본 고을 진사 이연 등이 영문(營門)에 글을 올 려 조정(朝廷)으로 상계(上啓)하여 정포(旌褒) 토록 하기를 청하였으며,무인년(戊寅,1638)에는 도사(都事) 박종부(朴宗阜)가 그 효행을 순백 (巡白) 구봉서에게 자상히 말하고 봉서는 그 사 실을 계초(啓草)가운데 대강 기록하였으므로 비 로서복호(復戶=세를면제한것)의명이있었다. 신사년(辛巳,1641)에 본 고을 영춘현감 박영철 (밀성인 좌상공 后)의 만언소 가운데 공의 행의 (行義)를 극진히 찬양하였고, 계미년(癸未,1643) 에는 우산 안방준이 참봉 박충염과 진사 안처공 등과 더불어 봉소(封疏)하기로 발의하고 9월 초7 일에 도내 유림이 모여 봉소상달(封疏上達)하였 다. 그때 예조판서 이경중과 대제학 이식, 도승지 김육, 이조참의 이덕수, 병조참의 정홍명 등이 상 의하고 다시 품계(稟啓)하므로 윤허(允許)하시 고정려하라는명(命)이내려졌다. △효자박계업(繼業) 박(朴) 공(公)의 휘는 계업(繼業)이요 자(字) 는 경장(景章)이요 아버지 첨추 오경(吳卿)은 바 로유신(惟新)의큰아들이다. 공이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긴다는 말을 들 었다. 정유년 왜란(倭亂)때 처자식을 놓아두고 몸소 모친(母親)을 등에 업고 산골짜기에 숨어들 었는데 문득 적병(賊兵)이 돌연히 몰아오며 모친 (母親)을 살해코자 하거늘 공(公)이 숲속에서 뛰 어나와 몸으로 가리다가 모자(母子)가 함께 피살 되었다. 아 참혹하도다. 혹은 말하되 적병이 공(公)의 영특한 것을 보고 달래며 함께 가자고 하되 공 (公)이 듣지 않고 큰 소리로 꾸짖으며 주먹으로 치려하다가그칼날에죽었다고한다. 인조(仁祖) 갑자(甲子, 1624)년에 연신(筵臣) 의 진백(陳白)으로 인하여 특별히 정려(旌閭)하 란명(命)을내리셨다. 삼강행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전해진다. 繼業負母, 幼學朴繼業昌平縣人事親誠孝丁酉倭 亂棄妻子負母避賊賊執繼業欲牽去繼業不忍捨母 賊殺之母亦死於繼業屍傍昭敬大王朝 門 (번역문=계업부모 - 박계업이 어머니를 업다. 유학 박계업은 창평현 사람이다. 어버이 섬김을 효성으로 하더니, 정유왜란에 처자를 버리고 어 미를 업고 도적을 피하려다 도적이 계업을 잡아 끌어가고자 하거늘 차마 어미를 버리지 못하니 왜적이 죽였더라. 어미 또한 계업의 주검 옆에 죽 었더라.소경대왕선조때정문을내렸다.) △효자박광업(光業) 참봉 치재공 휘 인경의 아들이다.字는 경건(景 建), 호는 해동거사(海東居士), 선조 5년(壬申, 1 572)에 태어났다. 동생 융경(隆卿)이 숙부 신재 (愼齋,휘 장경)공이 후사가 없어 양자로 가니 아 버지 어머니의 귀여움을 받으며 독자로 성장했 다. 선대의 효행을 본받아 지극한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숙종23년(1684년)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 졌다. 그러나 행실과 사적이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公은 청나라 태종이 침입 한 병자호란에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떠나은둔생활을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노중연(魯仲連,중국 전국시대 제나 라의 웅변가)이 동해를 밟는다는 의미로 호를 해 동거사(海東居士)로 짓고 음풍농월로 한세상을 보냈다. 공은 아마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여느 효 자처럼 시묘를 살았을 것이며 부모가 돌아가신 후 청 나 라 에 고 개 를 죽 인 조 정 에 비 위 가 상 해 숭 정처사로한세상을살았던것이다. △의인(宜人)박씨(朴氏) 의인(宜人) 박씨는 진경(眞卿)의 딸이요 유신 (惟新)의 손녀이다. 16세에 주부(主簿) 김기원 (金紀元)에게 출가하여 능히 부도(婦道)를 다 하 므로 김씨 문중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정유년 왜 란때 기원(紀元)과 더불어 산중으로 들어가 숲속 에 숨어 있으며 맹세하되 만일 적병이 오게되면 나는 죽기로 결단 할 것이니 부군(夫君)께서는 잘 피신하라고 하였다. 그 뒤 적병을 만났는데 적병 이 의인(宜人)을 핍박코자 하거늘 의인이 크게 꾸 짖으며 죽기로써 항거하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아그열녀(烈女)로다.갑자년(1624년)에계업(繼 業)과더불어정려(旌閭)의명(命)이내렸다. [의인박씨에게제한제문]所操孝節曷其身一劍 香魂千秋 日(소조효절갈기신일검향혼천추교 일) 간직한 바는 절개인데 어찌 그 몸을 돌아볼 까. 한 칼날아래 향기로운 혼(魂)은 천추토록 해 처럼 밝으리. 담양부사 덕수(德水) 이안눌(李安 訥)은 지체(致祭)함. [朴氏死賊,박씨가적에게죽다] 朴氏潭陽府人 主簿金紀元之妻也 有孝行丁酉 倭亂遇賊 將汚朴氏罵賊不屈而死 今上朝 門 박씨는 담양부 사람이니, 주부 김기원(金紀元) 의 아내다. 효도의 행실이 있더니, 정유왜란에 도 적을 만나 장차 더럽히려 하거늘, 박씨가 도적을 꾸짖어 굴하지 아니하여 죽었다. 지금의 조정에 서 정문을 세웠다.(동국신속삼강행실도 5집(열 녀도권5,6,7,8) /사진 글 정리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 l.net) 뱚효열부열전 함양박씨동정공후월영당종중충효 문(忠孝門) 충효문,전남담양군창평면절산리-함양박씨월영당종중의사효자(四孝子)의정려이다. 삼 강행실도(계업부모,박계업이어머니를업다) 삼강행실도(박씨사적,박씨가적에게죽다) 뱚충효문연혁 정려기(旌閭記), 1693년(癸酉) 대사헌 민우수(閔愚洙)가 지었다. 뱚사효일열(四孝一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