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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2월31일 금요일 7 (제180호) 기획 문익공(휘 淨)이 ‘만년(晩年)에 향제(鄕第,고향집)에 돌아 와서 전(全) 고을의 자제들을 가르치니 학생들이 많아 학사 (學舍)가 비좁아도 향학(向學)에 열정은 끝이 없어 향당(鄕 黨)에 아름다운 풍속(風俗)이 사무쳤다.’라는 기록과 문익공 을 비 롯 아 들 진 , 손 자 숙 번 의 묘 소 가 ‘진 목 정 안 산 ’에 있 다 고 기록되어있다. 진목정(眞木亭)의 다른 이름은 교귀정(交龜亭)이라 부른 다.진목정은 『화성성역의궤』에도 뷺장안문을 나와 북쪽으로 5 리 쯤인 지하동구(芝下洞口) 진목정 아래에 개울을 뚝 잘라 방죽을 쌓고 만석거라 이름 하였다.뷻라는기록이있다.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정조편에 보면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영우원)를 찾을 때 교귀정에서 쉬었다는 기록이 전해지 고, 교귀정은 또 일왕저수지 또는 교귀정방죽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이다. 교귀정 방죽은 정 조 임금이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많은 백성들을 이주시키면 서 방죽을 함께 축조한 뒤 만석을 거뒀다고 해 만석거라고도 한다. 이후 문익공의 증손(문형)이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치는 등 당쟁에 식상하여 화성시 남양면으로 이주 은거하여 선조 의 묘소를 돌보지 못한 상황에 세월이 흐른 뒤 대규모 저수지 로 개발되어 실전 된 것으로, 문익공은 당시 행정구역상 수원 화성(현 수원 장안구 송죽동) 인근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 다 . 음성박씨 대동보 문익공편을 보면 문익공의 증손 문형(門 亨 ) 의 묘 소 가 화 성 군 남 양 면 처 사 동 해 좌 (亥 坐 ) 로 되 어 있 다 . 아마도 진목정 부근에 거주하다 당시 시대상황이 단종복위 사건으로인한계유정란(癸酉靖亂)등크고작은변란으로인 해 낙향한곳이 지금의 화성시 남양면이라 구전(口傳)하고 있 다. 이후 문형(門亨)의 두 아들 중 장남 인원(仁元)은 화성시 팔탄면 노하리로 이거하여 인근지역에 산재하며 집성촌을 이 루고 있으며, 차남 인량(仁諒)은 화성시 우정면으로 이거하 면서 인근 장안면 덕다리, 평택시 포승읍 홍원리 등에 집성촌 을 이루고 있어 팔탄면 노하리의 입향조는 정릉참봉과 곡산 부사를역임한휘인원(仁元)공으로1500년경이될것같다. 입향조 곡산부사공 휘 인원(仁元)의 생몰연대는 기록이 전 해지지 않으나 장자 응량(應樑)을 비롯한 후손들의 출생연도 를 역산하여 보면 1400년 후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있다. 성균진사와정릉참봉곡산부사를지내고 아들넷을두었는 데응량(應樑)·응주(應柱)·응환(應桓)·응추(應樞)이다. 장남 응량(應樑)은 부사정(副司正)과 홍문관박사(弘文館 博士)를 역임하였으며 지혜와 슬기가 남달라 어렸을 때부터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았다고 한다. 1522년 예문관 부제학 겸 공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그의 아들 의립(義立)은 1546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이조좌랑, 사헌부집의를 역임했다. 손자유현(維賢),계현(繼賢)을 두었으며,유현(維賢)은문필 이 뛰어나 선조 戊寅(1578년)년에 진사시에 오르고 한림(翰 林)과 지평(持平)을 역임하고 승정원 참찬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부인청풍김씨와의사이에후사(後嗣)가없어동생계 현(繼賢, 성균생원 동추부사)의 삼남 태정(台鼎)을 취하였으 며, 그는 성균생원과 동추부사를 역임하고 아들 진휘(震彙, 통정대부),보휘(寶彙,통정대부),만휘(萬彙),무휘(茂彙)등 4형제를두었다. 이중 장남 진휘의 아들 종우(宗祐)는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으로 가선대부에 가자되었으며, 손자 치정(致貞)이 승 정원 통의랑을 지냈다.특히 부모 섬김에 정성을 다하는 등 효 자로 형제간에 우애와 친구 간에 교우가 남달라 단인(端人, 단정한사람)으로 불렸고,5대손 두혁(斗赫)의 자(字)는성보 (星甫), 호(號)는 모은(茅隱)으로 학문이 뛰어나 수원 문묘 (文廟, 향교 내 사당)에서 많은 공헌으로 지금도 유림인들에 의해오르내리고있다. 중추부사공 태정의 차남 보휘(寶彙)의 아들 종효(宗孝)는 동중추부사를지냈다. 홍문관 박사 응량(應樑)의 아들 의립(義立) 차남 계현(繼 賢)은 생원시에 올라 동지중추부사로 그의 아들 태상(台相) 은 수직으로 가선대부 부호군, 증손자 종규(宗規)는 휘릉(인 조의계비장렬왕후의능)참봉이다. 입향조의 차남 응주(應柱)의는 현손 정휘(廷彙)에 이르러 무후이고,삼남응환(應桓)공(公)은무과로선전관과병조참 의를역임했다. 손자 동설(東卨)이 진사시에 올랐고, 동기(東夔)는 무과에 등재하여절충장군부호군을역임했다.진사동설(東卨)의아 들제도(濟道)는통의랑,손자수언(秀彦)은수직으로통정대 부에 가자(加資)되었고, 증손 필경(弼慶)은 의녕원[懿寧園, 조선 영조의 손자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 참봉을 지냈다. 아들둘을두었는데수일(壽一)·수오(壽五)이다. 차남 수오(壽五)의 6대손 영 근(英根)은 수원시 팔탄면장을 역임하고 화성시의회 운영위원 장, 민주평통자문회의화성시회 장,성균관유도회 총본부 경기도 부회장, 화성시 노인회장 등 사 회 단 체 장 을 맡 아 많 은 공 을 세 워 주 민 들 이 세 운 공 적 비 (3 개 ) 가 있고,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 상했다.특히 문익공파 회장으로 종회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음성 박씨 대종회장 등 종중에 큰 족 적을남겼다. 사남 응추(應樞)의 후손들은 조선시대 두각을 세운 현조(顯 祖)는 없으나 후손들은 타고난 숭조정신으로 돈종(敦宗)하고 있어 종원들의 귀감이 되고 있 다. 문익공의 후손들이 입신양명(立身揚名)하지 않은 것은 아 마도입향조의아버지휘문형(門亨)공이계유정란으로인해 수원에서 남양으로 은거하면서 관로의 험난함, 즉 사색당파 에 의한 정치에 회의적인 생각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생각해본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후손들은 지역의 토반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두각을 보이고 있음을 알수 있다. 앞서 소개한 전 면 장 영 근 ( 英 根 ) 선 행 을 비 롯 그 의 아 들 용 일 현 종 이 팔 탄 면 주민자치회 회장으로 이역을 이끌고 있으며, 평현 현종은 노하문중 회장을 역임하고 문익공파 종회장으로 문중의 체계 를세우는데큰활약을하고있다. 현 노하문중 회장 용범 현종은 중등 교장으로 평생 후학을 가르쳐온 진정한 스승으로 많은 학생들이 기억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해근 현종은 초등 교장, 제덕 현종은 행정직 사무관 으로퇴직했다. 현직에는 선제 현종이 육군 대령으로 복무하고 있고, 용석 현종이 마포구청 사무관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슬기 현종이 변호사로활약하고있다. 노하종중은입향조휘인원의후예모임으로전통문화수호 와계승을통해종원들의친목을도모하고있다. 내실을 다지며 2개의 건물에서 발생한 임대수익을 극대화 하면서 육영사업을 위해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으며, 향후 고 령종원들에대한복지정책도펼예정이다. 용범회장은갈수록뿌리개념이희박해지고전통문화가소 실되어 가고 있어 안타까운데 설상가상 ‘코로나19’로 인해 종 중이 더 침체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고 전하고 그러나 선조 를 위한 숭조사업과 종원들의 복지 등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 력 해 나 갈 것 이 라 고 말 하 고 많 은 종 원 들 이 함 께 할 수 있 도 록 관심을당부하고있다. 뱚집성촌탐방 경기도화성시팔탄면노하리 (음성박씨문익공파노하문중) 음성박씨문익공파노하종중의520여년세거지노하리전경. ‘화성(華城)’은 1794년(정조 18년) 정조가 수원부 읍치와 현륭원을 위호할 성곽의터를 둘러보면서 장자(莊子)의‘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를 생각하며 붙임 이름으로, 이 땅을 풍요의 고을로 만들어 여민동락(與民同樂)하겠다는 정조의 의지 가 담긴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그리고 팔탄면은 화성시 중앙부에 있는 면. 대부분의지역이 100m 이하의저평한 산지를 이루며,곳곳에 천덕산(133 m)·둥구산(126m)등이 솟아 있다.최근 들어 공장 지대가 조성되면서 3개 공단과 협동화단지가 있 으며, 남서부에는 테크노단지·협동화단지·공업 단지등이입지해있다.문익공파후손들이노하리 에 정착한 것은 1500년 경으로 순수집성촌을 이루 며 입향 520여년의토호세족으로성장하여소개해 본다. 입향약사 입 향 조 이 하 세 계 면장 박영근 송덕비(팔탄면 동 방저수지) 마을약사를소개해준임원진(왼쪽부터용일총무 ,용범회장,평현고문) 노하종중회 치조(治朝)에 서서 이름을 펼치기는 쉽고 난세(亂世)에 당 하여몸을조철이하기는어려우니이점이실로선유(先儒)들 의 일컬어 이르던 바로서 이에 능히 그 몸을 보존하여 그 이름 을도망하는자도수천고(數千古)를걸쳐손가락이많이굽혀 지지않지만마침내신명(身名)을더럽힘없이능히현명결신 (顯名潔身)을 극진히 하는이에이르러는어려움이더심하는 지라. 나의 보는 바로는 박공영철(朴公英喆)인 그 사람이라. 공(公)은 밀성인(密城人)이니 문익공(文翼公) 효신(孝臣)의 후예오, 좌찬성인지(左贊成麟趾)의 육세손(六世孫)이라 찬 성이 정손(貞孫)을 낳으니 벼슬이 예천군수에 이르렀고 이분 이 번(蕃)을 낳으니 고산(高山)현감이오. 이분이 만령(萬齡) 을 낳으니선공감직장이오.이분이대인(大仁)을낳으니효행 (孝行)으로 천거되어 훈도에 이르렀고 이분이 홍정(洪楨)을 낳으니 증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贈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 니 공(公)의 선고(先考)라.비는 숙부인창원정씨(淑夫人昌原 丁氏)니, 낙춘(樂春)의 따님이라, 공(公)이 명묘(明廟) 병인 (丙寅, 1566년)7月5日에 태어나니 어려서부터 뜻을 세워서 동작하고 그침과 기국이며 도량이 모두 성인(成人)과 같으며 학문을부지런히하여몸을닦아서교회(敎誨)한이를번거롭 게 하지 않았고 문장과 재예도 또한 일찍이 성취되니 당시(當 時)의 제현(諸賢)들이 추중(推重)아니 할이 없었다. 그의 애 친(愛親),충군(忠君)의성(誠)에 이르러는 하늘께얻는 그대 로였다. 동년(童年)에 어머니를 잃어 거상을 잘못하였다하여 자람에 미쳐 추복(追服)의 예(禮)을 행(行)하여 묘측(墓側) 에 여막치고 죽 먹고 삼년(三年)을 지나며 새벽과 어둠에 반 드시 사당에 참례하야 심한 병이 아니면 일찍이 폐지하지 않 이 하더라및 광해(光海)조 때에 소인들이 정권(政權)을 잡아 윤리(倫理)가 퇴패하니 이에 개연(慨然)히 탄식하여 가로대 「이 어찌 사자(士子)가 출신(出身)할 시기리오」하고 인하여 과거를 폐하고 자취를 감추어 장차 종신(終 身)하려 하였더니 주정(主政)이 더욱 혼란하여 계축년(癸丑年)에 극도로 가니 공(公)이 관학(館學)의 제생(諸生)과 더불어 창의(倡義)하 여항소력간(抗疏力諫)하니그때한번죽음을모면할것만해 도 또한 다행이었다.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개옥(改玉)하 신 후에 이르러서 비로소 과거에 응하여 갑자(甲子,1624년) 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효행(孝行)으로 강릉참봉에 이어 사옹시봉사에제수받았더니계유(癸酉,1633년)문과(文科) 에 올라서 기조(騎曹)병조(兵曹)로부터 승문원교검(承文院 校檢)에 옮기니 시년(時年)이 이미 70이러니 계대부인(繼大 夫人)의 나이 또 八十이라 위하여 봉양(奉養)의 고을을 빌어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제수 받았는데 치적(治績)으로 특별 히 통정정(通政旌)을 더하였다. 향실(香室)에 들어 향실사 (香室事)와 영녕전(永寧殿)의 덕종(德宗)과 예종(睿宗)의 위차(位次)와 및 태종(太宗)의 휘호(彙號)로 전례(典禮)를 명거(明據)하여 조목조목 열거하여 진소(陣疏)하고 丁亥에 또 시폐(時弊)로써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니 너그럽게 비답 하시고 초피(貂皮)와 이모(耳帽)를 특사(特賜)하여 권장하 셨다. 인묘(仁廟) 丁亥(1647년) 12月 12日에 정침(正寢)에서 역책(易책)하니 향년(享年)이 82세라. 묘(墓)가 창평쌍가동 사좌원(昌平雙駕洞巳坐原)에 있으니 숙부인김해김씨(淑夫 人金海金氏)부하였다.유자오인(有子五人)하니 장(長)에 정 완(廷琬)은 무후(無后)오.둘째는 정연(廷璉)이오.셋째는 정 교(廷교)오. 넷째는 정진(廷璡)이라. 다섯째는 정서(廷瑞)이 다. 선무랑(宣務郞)이오. 내외(內外)의 손증(孫曾)이 약간인 (若干人)이라. 아! 이제 공(公)의 시대와 거리가 三백(百)여 년이라 언행(言行)과 논술(論述)은 그 상세함을 얻기 어려우 나 신자(臣子)되는 자(者)의 도(道)는 충(忠)과 효(孝)를 할 따름이라. 동년실시(童年失恃)에 추복(追服)하여 예를 다하 니 효도(孝道)에 극진하고 시기가 혼조(昏朝)를 만나서 상소 하여 윤리를 두터이 하니 충성(忠誠)에 극진하는지라. 또 군 자(君子)의 숭상하는 것이 출세와 은신이어늘 공(公)의 평생 출처(平生出處)를 추적해 보건대 시기 맞추어 부끄러움이 없 으니 여기 두가지에서 이에 가히 공(公)을 알지로다. 이제 그 의 후손 정석(正錫)이 와서 공(公)의 묘문(墓文)을 청하거늘 내 처음으로 공(公)의 사적(事蹟)을 얻어보고 불승탄앙(不勝 嘆仰)할세, 나의 참외를 잊고 이에 가장중(家狀中)에 나아가 대략 출처(出處)를 기록하고 인하여 명(銘)을 부치니 명(銘) 에 가로대 말을 성실대로 다하는 것이 이른 충(忠)이오, 몸을 도(道)에 맞추어 깨끗이 하는 것이 이론 현(賢)이니 창평(昌 平)의 산이 드높아지고 창평(昌平)의 물이 흐르리로다. 여기 택조(宅兆)에 편안히 잠드시니, 그윽한 덕(德)으로 천년(千 年)에 새기노라.輔國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 兼史曺判書判義 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 同知成均館事 五衛都摠 府都摠管奎章閣原任直閣世子左副賓客徐俊輔謹撰 21세기 창평향교가 전남지역의 유 풍의 진원지라 할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박문수 전교 를애둘러표현하는것같다. 2017년 8월 13일 취임한 박 전교는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장애가 있어 하 지 못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며 제도 개혁을 밝히고 “매 삭망 봉심에 경전 강의로 지식을 함양하고, 지역 내 사라졌던 각종 유림단체를 부활시켜 가칭 창평 문화 단체를 만들어 경전 연구와 유교문화에 맞는 아카 데미를시작해보고싶다”며향교운영에관한포부를 밝힌바 있다. 이에 취임이후 유교아카데미를 개설하여 청소년들의 인성 교육과 예절캠프 등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내 고있다. 그리고 2018년 홍살문 복원, 고직사(수련원) 앞 1583년 축 조된 한 436년 된 우물 보수,2019년 외삼문 복원,대성전 27위 위패 율목(栗木)으로 복원, 대성전 실내 보수, 교궁(校宮) 주 변 소나무 27주(배향 27위 상징)를 식재 관리하고 있으며, 고 서중학교와 자매결연하여 옛날 제자가 되려고 스승을 처음 뵐 때에 가지고 가던 예물(束脩之禮)시연회와 향교 관내 초· 중등학교 인성교육에 매진하고 담양 교육청과 협력하여 유교 문화활성화에노력키로협약하기도하였다. 특히 미복원된 사마재(司馬齋) 등 부속건물의 복원에 힘써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2020년 12월 대성전과 명륜당이 국가 보물로지정되는데혼신의노력을다했다. 이처럼박전교께서창평향교와인연을맺어부흥시킨것은 선고(先考)의영향이크다할것같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서 밀양박씨 낙촌공(휘 충원) 의16대손,양성공(휘승안)13대손으로태어났다. 양성공은 1572년 월봉공 휘 안명의 아들로 태어나 사마시에 급제하여 양성현감을 지내고 사계 김장생, 포저 조익, 기엄 (奇奄) 정홍명(鄭弘溟)과 종유(從遊)하면서 호남과 인연이 깊다.그리고양성공의현손통덕랑 통정사의(通政史議)公휘 두명(斗明, 子 宗瑞) 공이 향선생으로 능주목에 입향하면서 전남화순군도암면대초리에집성촌을이루었다. 박 전교의 창평 세거는 백부가 몸이 허약해 선고께서 담양 의 친구가 운영하는 한약방에서 약을 조제하면서 창평과 인 연을 맺어오다 60여 년 전 담양군 고서면 주평리(瑞坪齋)로 이거했다. 집안의 엄격한 훈육에 따라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이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을 수료한다. 창평향교 장의, 사무국장, 유도회부회장을 맡으면서 창평향교와 한 몸이 되 었던것이다. 박전교는성균관청년유도회대의원,성균관유도회전라남 도상무위원, 성균관전학, 전라남도향교재단이사, 성균관전 인, 성균관자문위원, 성균관 인성교육 강사, 성균관대학교 유 학대학원 광주전남총문회 이사, 남간사 별유사, 담양유교문 화유적연구원장, 창평향교 예학(睿學)연구원장 등 유교관련 중책을역임하고담양지역각종사회단체를맡아온바있다. 뱚 ▶6면에서이어짐 뱚[고직당박영철墓誌銘] 박문수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