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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5월31일 월요일 7 (제173호) 관향조 종친회·기획 한강대교를 건너 노량진 언덕에 사육신 공원이 있다. 이곳이 조선 초, 계유정난(14 52년)으로 김종서 등 원로대신들을 살육 한 뒤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정권 을 잡은 세조(수양대군)에게 항거하다 무 참히 처형된 사람들의 무덤이 있는 장소이 다. 조선시대 최대의 충신 살육사건으로서 이를 병자사화라고 일컫는데, 그 당시 사 지가 찢어지는 참혹한 거열형(車裂刑)을 당하고 새남터에 버려진 희생자들의 시신 을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밤에 몰래 수습 하여 강 건너 노량진언덕에 매장하였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이제는 마치 오 래된 전설과 같이 아름다운 충신들의 이야 기로승화돼민간에전해지고있다. 여기는 오랫동안 황량한 분위기여서 지나는 과객의 비감 어 린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숙 종~영조~정조 대에 이르러 선비(儒者)들에게 충렬을 기리기 위 한 제사를 봉행토록 허락하였다. 500여 년 동안 한적한 곳이었 던 이 장소에 광복 후에야 비로소 정부의 관심으로 충신들을 기 리는 육각비가 세워지고 해마다 제향행사가 열리게 된다. 1970 년대에 들어서 국력 신장에 따른 국민정신교육 차원에서 전국 적으로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을 현창하는 사업이 시작되면서 사육신묘역도 대대적으로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공원으로 재조 성하는사업이착수되었다. 공원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다 보면 안내판과 만 난다. ‘사육신 묘역’에 관한 설명문으로 여기에 성삼문·박팽년· 하 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그리고 맨 밑에 김문기의 역사적 자 취에 대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기왕에 알려진 여섯 분의 사육 신외에‘김문기’가올려져있는것이다.500여 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모든 사람들이 충신의 표상으로 기억하고 있던 사육신 명 단에언제부터,무슨연유로김문기라는인물이끼어든것일까?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있다. 조선 초기의 건국과정을 거치며 세종 대에 이르러서 정치 적 안정을 확보하여 국가적 기반이 탄탄해진다. 전통적으로 왕 조국가는 왕위계승의 절차에 갈등이 없어야 안정된 국정운영이 가능하다. 이른바 적장자(嫡長子)계승 원칙이 전형적인 왕권 교체의 모범적인 사례로 인식되고, 그 실천으로써 정권의 정당 성과 연속성이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 초의 정치적 시대정신은적장자에의한왕위계승원칙의실현이었다. 그러므로 세종에서 문종으로, 문종에서 단종으로 이어지는 3 대에 걸친 왕위계승은 완벽한 적장자계승의 원칙이 구현된 왕 조국가의모범적정권승계행태라볼수있다. 그러나 정치현실은 탐욕자의 등장으로 순리가 헝클어지기도 한다. 바로 수양대군의 찬역(簒逆)행위가 순탄한 정치적 과정 을 파괴한 역사적 반동(反動)의 사례이다. 이긴 자는 충신이고 진 자는 역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계유정난과 병자사화로 희생 된 사람들은 수백 년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역사적 인물로서 제 대로 평가되거나 예우를 받지 못하였다. 조선의 국가이념인 성 리학의 의리(義理)정신이 패도(覇道)정권에 의해 오랫동안 압 눌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생육신 중 한 분인 남효온이 『육 신전(六臣傳)』을 지어 사육신의 충의(忠義)가 세상에 알려지 고 차츰 단종충신(端宗忠臣)들이 역사 흐름의 수면 위로 등장 하게된다. 숙종 대부터 시작하여 영·정조 대에 이르러 충신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제사왕국인 조선사회 에서 최선의 예우인 제향의 대상으로 선정하여 추모하게 된다. 그리고 정조대왕은 왕명으로 단종충신들에 대한 제향의 위차 (位次)를 정리하여 이른바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획정하 고,영월의 단종 능 아래에 충신단을 만들어 제례를 봉행토록 하 였다. 참고로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복위기도와 관련하여 희생된 충신들의 제향 위차를 정리한 어정배식록의 구성을 예시하면 다음과같다. ① 왕족으로 죽은 육종영(六宗英)-안평대군 이용·금성대군 이유·화의군이영·한남군이어·영풍군이전·하령군이양 ② 단종의 외척으로 죽은 사의척(四懿戚)-송현수·정종·권자 신·권완 ③ 계유정난 때 죽은 정승으로 삼상신(三相臣)-황보인·김종 서·정분 ④판서로서죽은삼중신(三重臣)-민신·조극관·김문기 ⑤장수로서죽은양운검(兩雲劒)-성승·박쟁 ⑥ 단종 복위 주동자로서 죽은 육신(六臣)-박팽년·성삼문· 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어정배식록은 신분과 관직 그리고 충절의 강도를 가늠하여 여섯 등급으로 분류한 조선왕조의 공식기록이다. 그러함에도 5 00여 년의 세월이 한참 흐른 뒤,현실 권력을 남용하여 역사기록 을 변경하려는 행위는 역사에 대한 범죄라 단정하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정조대왕은 영명한 학자 군주이다.그의 업 적을 부인하려는 작태를 용인한다면 21세기의 역사 지성이 과 연살아있는것인지,엄중히묻지않을수없다. 사건의 발단은 어느 한 개인이 자기 문중의 조상숭배를 위해 무모하게 벌인 과잉행태에서 비롯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1970 년대 사육신공원의 성역화사업에 뜬금없이 격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포함시켜 세간에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기존의 사육신 묘역에 모시지 못했던 두 분,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 源)의 묘를 새로 모시려 하던 차에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 정부의 핵심권력에 있으면서, 자기 조상의 허묘(虛墓)를 공원 재단장사업 과정을 통해 사육신묘역에 끼워 넣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른 것이고, 엄 청난 논란이 있었음에도 그 이후 오늘날까지 왜곡현장은 그대 로유지돼오고있다. 일개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려는 권력자와 그에 게 곡학아세한 사람들 간의 유착 관계에서 비롯된 희대의 ‘충신 끼워넣기(틈입闖入)사건’에대해그경위를추적해본다. ‘육신(六臣)’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분은 남효온(南孝 溫)이다. 그가 지은 븮육신전븯(六臣傳)에 수록된 인물들이 박팽 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분이란 것은 모 두가 아는 일이다. 그러나 ‘김문기’는 육신전에 아예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정조대왕의 어정배식록에도 김문기는 육신(六 臣)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앞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사육신 보다 위차가 두 단계높은‘삼중신븯(三重臣)에포함되어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료에도 불구하고 김문기의 후손들은 남효온 의 육신전이 잘못 기록되었다거나, 어정배식록의 편성에도 오 류가 있었다고 몰지각한 억설(臆說)과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날조된 역사 해석을 강변하면서 사실(史實)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신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장 김재 규가 김문기의 후손이다. 그가 그릇된 조상숭배의식을 바탕으 로 국사편찬위원회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여 사육신묘역에 자 신의 조상인 김문기의 산소와 위패를 무리하게 안치하는 만행 을 저질렀던 것이다.사육신(死六臣)이 사칠신(死七臣)으로 둔 갑한곡절의내막이다. 그래서 ‘7’을 ‘6’이라고 하는 바는,오랜 옛날 중국에서 진시황 이 죽 은 후 , 간 신 조 고 (趙 高 ) 가 어 린 호 해 (胡 亥 ) 황 제 에 게 ‘사 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겨댄 고사(故事)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어정배식록의 순위 배정에서 공조판서를 지낸 김문기를 4위 등급인 중신(重臣)으로 예우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여기 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소장 신료들로 구성된 6위 등급의 사 육신 대열에 끼어들려는 집착을 보여왔다.바로 이 점이 ‘사육신 만이충신’이라는착시적무지의소치라고비난받는것이다. 김문기 후손들의 사육신 끼어들기(틈입·闖入)기도는 선인 (先人)들의 역사기록정신에 대한 비례(非禮)일 뿐 아니라, 후 손들 스스로 자기 조상의 품격을 폄하시키는 자가당착적 역사 조작으로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허물’만 덧붙이는 일일 것이 다. 다행히도 국사편찬위원회는 사육신의 인적구성에 변경 사항 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압력으로 사육신묘역에 들어앉은 김문기의 허묘와 위패는 그대로 있다. 사육신공원은 후세들을 위한 교육현장이다.따라서 사육신묘역 의 명실상부한 원상회복은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어야 하고, 반 드시해결해야할우리세대의당면한책임이라하겠다. 함석헌옹은븮의인의피븯라는글에서이렇게갈파했다. “육신(六臣)의,말을 뛰어넘은 이 비장한 사실을 한국 사람인 이상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차라리 세익스피어를 못 읽고 괴테 는몰라도성삼문은알아야한다.” 사육신공원 곧, 절의(節義)의 상징적 장소가 제 모습으로 돌 아가야할이유이기도하다. 사육신공원의불편한진실 뱚특별기고 노량진 언덕의 황량한 바람 - 고혼(孤魂) 의절사:사육신의위패가봉안된사당(사진제공박용옥) 역적에서충신으로,역사적평가의반전(反轉) 사육신틈입(闖入)사건의진상 권력자의야바위역사왜곡(歪曲) 현대판지록위마(指鹿爲馬) 역사왜곡은선인(先人)의기록정신에대한비례(非禮)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본관은 양주, 아호는 월천(月泉)으로 서울 태생이다.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서울도시문제를 공부했다. 중 앙일보에서 발행한 성씨백과 ‘성씨의 고향’ 편 집에 참여하여 보학과 향토사에 관심이 많았 으며, (사)서울문화역사학회 등 향토문화 단체 에관여하고성씨연합회사무총장에재직한바 있다. 그동안 낸책으로는족보용어해설의‘족 보사전’, 서울의 모습을 얘기한 산문‘서울 꼴불견100’, ‘어글리서울’ 등이 있고븮월간경제풍월븯에“역사인물 시리즈(한성판윤열전)”을연재했으며,사 육신공원의불편한 진실을그려낸‘사육신’을지낸해펴낸바있다. 그 외에 족보와향토에관한 소소한 글을썼다. 뱚▶글쓴이월천최종인은븣 어변당공은부인평양조씨와의사이에휘유원(由 元)을 낳았으며, 명나라 사신으로 가 세 부인에게서 삼형제(一傑, 二傑, 三傑)를 두었으나 소식이 단절 되면서족보에등제하지못했다. 휘 유원의 號는 용당(龍堂)으로 통덕랑 예빈시 주 부를 지내고 아들 숭종(崇宗)을 낳았는데 그의 호는 서암(西菴)으로통정대부청주목사를지냈다. 서암공의 아들 옥형(玉衡)의 호는 삼락재(三樂 齋),무과에 급제하여 희천군수를 지내고,아들 모우 당으로 인해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슬 하에 아들 득룡·몽룡을 두었는데 장자 득룡은 수문 장으로 아들 사빈과 손자 형발·진발에 이르러 전해 지지않는다. 차남 몽룡의 자(字)는 응운(應雲)호는 모우당(慕 憂堂)으로 1559년(己未)에 무과에 급제하여 1581년 선전관에 오르고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 와 학문탐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하였으나 1592년 임 진왜란이 발발하여 백의로서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 성 곽 망우당 진영으로 가 왜놈들을 물리치고 사로 잡는 등 혁혁한 공으로 훈련원정을 제수 받고, 원종 공신에 녹훈되었다. 모우당공이 왜노가 바다건너 왔 다는 소식을 듣고 칼을 울리며 쓴 시가 전해지는데 다음과같다. 븮하늘이 사내를 낳았는데 소를 삼킬 용기가 있으 며, 더군다나 젊은 나이에 우대하는 나라 은혜 입었 구나. 나라가 어지러운데 어찌 다 처자를 생각 하겠 으랴. 용기를 분발하면 적의 머리 부수기는 어렵지 않 다 . 비 내 리 는 듯 한 돌 과 강 한 활 시 울 에 연 약 한 힘 걱정스러우나, 천금 같은 준마를 타고 달리는데 익숙하도다. 모래벌판을 우인지경같이 달려가니 격 분한충성은이번에죽고말것이야븯 모우당공은 아들 사순·사수·사봉·응남 등 사형제 를 두었는데 장남 사순(士純)은 선교랑 예빈시 주 부, 차남 사수(士粹)는 창락도찰방, 삼남 사봉(士 奉)은가선대부에가자되었다. 모우당공의 차남 사수(士粹, 찰방)의 손자 세용 (世墉)의 호는 죽림재(竹林齋), 학문이 뛰어나 사림 의추앙을받았다. 6세에 어머니 유씨가 별세함에 성인과 같이 예를 다했고, 21세에 아버지 상을 당해 여묘 3년 동안 정 성을다했다.상을마친뒤에는과업(科業)을폐하고 오직 경사(經史) 공부로서 스스로 즐기면서 당대의 명현석학들과 교유하며 예학을 연마하고 의리(義 理)를닦아사림의추앙을받았다. 이처럼 어변당공의 후예는 학문을 숭상하고 무예 를 익히어 국가의 난에 몸을 아끼지 않은 살신성인 의 정신을 보였다. 그리고 모우당공의 손자와 현손 대에 이르러 각처로 이거하여 세거지를 이루면서 지 명을따소문중을형성하고있다. 500여년이 지나는 동안 두고 온 삼형제(一傑, 二 傑, 三傑)의 소식은 단절되었다. 단절되는 동안 ‘밀 양읍지’, ‘밀양미신록’ 등의 기록을 토대로 꾸준히 탐족(探族)하던 중 1990년 12월 7일자 한국일보에 중국 연변대 고영일교수의 기사에서 이들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중국을 왕래하는 통역인 최창근씨의 안내로 2000년 8월 23일 요령성 본계(本溪)의 일걸 (一傑) 후손의 표문권(瓢文權)씨의 집을 방문 기적 적인 만남이 성사되어 조상의 내력을 들을 수 있었 다. 연경(燕京-현 베이징)에서 한 치라도 한국 쪽 동 으로 이주 정거(定居)하여 영원(英元, 一傑), 영권 (英券, 二傑), 영강(英强, 三傑) 등 삼형제가 건촌 (建村) 탕하반(湯河畔)에 박가(朴家)로 정착하여 각각박문(朴門)의1세조로터를잡았다.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짐이 있고 헤어지기로 정해 져 있으나 이는 반드시 돌릴 수 있는 것이 세상 이치 이듯(會者定離,定離必反)두 나라 후손들의 만남은 이렇게시작되었다. 2001년 7월 이걸(二傑)의 후손 표성일(瓢腥一)이 내한하여 추향대제에 중국자손 대표로 종헌관으로 헌작하기도했다. 한편 어변당공께서 황제의 허가를 받아 본국으로 돌아올 때 세 부인에게 작별의 시를 주었는데 내용 은다음과같다. 븮만 리 되는 옛 나라의 임금 은혜 갚을 몸이, 삼생 인연 이별함이 삭ㅎ 쓰라림을 알리로다/ 한 두루미 술이 다하니 무산의 구름은 얇아지고,덮던 이불 한 쪽 비니 나비 꿈만 잦았도다./ 색계라고 어찌해서 절개가 없겠으며, 위태한 나라에도 충성있는 신하 어찌 없으랴/ 이별은 할망정 다행이도 세 자식이 있으니 그래도 호희가 바닷가에서 우는 것보다 나 으리븯 어변당공의 후예는 어변당공의 현손 모우당이 아 들 4형제를 둠으로써 크게 번성하고 또 이들 사형제 의 아들과 손자대에 이르러 각 지역으로 이거해 가 면서 집성촌을 이루며 지명을 따 문중을 이루고 있 다. 모우당공의 장자 사순(士純)은 장남 종선(宗璿) 은 밀양 상남 오산, 종선의 차남 세규(世奎)는 밀양 하남 백산. 상남, 초동, 단장, 사순의 차남 종연의 후 예는 창원 대산, 모산, 사천, 곤명, 신흥, 모우당공의 차자사수(士粹,찰방)는아들7형제를두었다. 첫째종장(宗璋)의첫째아들세용은밀양초동,경 산, 청도 풍각, 하동 진교, 진주 이반성. 둘째 세성은 승주 쌍암에 거주하며 동일재가 있으며, 마을 앞 후 손 주찬(柱燦)의 효행비가 있다. 셋째 세주(世柱)는 경북의령군궁류다원에세거한다. 찰방공(휘사수)의둘째종원의후예는창녕도천, 찰방공의 셋째 종기의 장남 세원은 부산 진구, 둘째 세춘은 밀양 무안 상남,경산 하양,셋째 세구는 대구 신천, 서울 송파, 밀양 부북. 찰방공의 넷째 종진의 장남 세훈은 사천 곤명,곤양.둘째 세장은 진주 이반 성,셋째 세문은 밀양 무안,창원 찰방공의 다섯째 종 구의 장남 세기는 속초 운산동, 차남 세생은 사천 곤 명, 여섯째 곤명은 전해지지 않고, 일곱째 종유의 장 남 천명은 울주 서생 용리에 있으며 청량읍 문죽리 어변재가있다. 둘째 천성은 함안 법수 윤내, 마산 석전동이며, 모 우 당 의 셋 째 사 봉 (士 奉 ) 은 창 녕 계 성 계 남 에 세 거 한 다. 어변당공의 주요 유적은 경남 밀양시 무안면 연산 리 상당동(연산1길 29) 덕연서원 주변에 있다. 덕연 서원 경내에는 어변당과 적룡지,향토사료관이 있으 며, 후원에는 어변당 박곤 선생의 신도비각과 몽은 귀국이별시(蒙恩歸國離別詩)와 모우당공의 명검시 비(鳴劍詩碑)등이 있다. △어변당거실(魚變堂居室,生家,지방문화재190 호) 은 적룡지 옆에 있다.선조 초기 박곤 선생께서 건 립한 집으로 임란을 거치고 1652年 壬辰年에 밀양부 사 김응조께서 중수하고 그 後 1836年 임신년에 이 휘녕밀양부사께서重修했다. △적룡지(赤龍池,기념물 166호) 는 기르던 물고기 가용으로변화하여승천한유적지이다. 용으로 변화하는 데는 큰 호수나 큰 강물이나 바 다 같은 곳에서 변화하는데 이 작은 못 깊이 한자가 못되는 곳에서 龍이 되었다는 것은 맹종(孟宗)의 孝 誠에 감동으로 눈 속에 죽순을 구한 것과 왕상(王 祥)의 孝道에 얼음 속에 잉어를 얻은 것과 같이 어변 당 박효자의 지극한 효도에 감응되어 물고기가 용 (龍)으로 변화(變化)한 효도지(孝道池) 또는 적인 어(赤鱗魚)가變化한적룡지(赤龍池)이다. △충효사 - 충효사-밀양시 무안면 연상리 상당동3 94덕연서원의묘우(廟宇)이다. 충효사는 충의와 효행을 상징하는 사우로, 중앙에 한성판윤 어변당 박곤선생,좌측에 임진왜란때의 선 무원종공신인 훈련원정 모우당 박몽룡 선생,우측에 처사죽림재박세용선생이배행되어있다. 매년 음8월 하정일(下丁日)에 영남 유림주관으로 추향대제를봉행한다. /글·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6면에서이어짐 모우당공명검시비(덕연서원후원효충공원) 몽은귀국이별시(蒙恩歸國離別詩) 황제의허가를받아본국으로 돌아오게될세삼희에게작별시 를주었음. 중국에두고온아들삼형제 집성촌과유적 동일재-전남순천시승주읍승주신성길14 어변재-울산울주군청량읍문죽리744 어변당공의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