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age

2021년1월31일 일요일 7 (제169호) 기 획 뱚감헌공이하세계 뱚세거지변천과집성촌 뱚주요유적 뱚맺음말 국경 침범한 섬 오랑캐 죄악이 하도 커서(島夷侵境罪斯盈) /임금님 크게 성내 군사 일으켜 맑히려 하시니(赫怒興師欲廓 淸)/제장들의 용병은 모두 율법대로 하였건만(諸將用兵皆以 律)/ 우리 경은 분전하여 혼자 목숨을 바치었네(我卿奔殿獨 捐生)/조정에서는 진도하여 은수를 후히 내렸고(朝廷震悼恩 加數)/ 향리에서는 슬퍼하여 실성통곡을 하누나(閭里悲號哭 失聲)/ 성왕 시대 지금엔 무사들도 하 많으니(聖代至今多武 士)/ 누가 다시 동쪽을 정벌하여 한번 씻어버릴꼬(誰能一 써 更東征)하였다. 그리고 금릉(金陵븡현 김천)을 표현하는 시에,“대숲에 서늘 한 바람이 일고,솔밭에 푸른빛이 떠도니,객사의 난간은 의지 하여놀기알맞은데,들은넓고사람은빽빽하구나.”하였다. 감헌공은 우당 휘 융(融)의 장자이다. 세종6년 142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내고 1478년(성 종10)에돌아가셨다.배위는정부인나주오씨이다. 슬하에 문손(文孫)·승손(承孫)형제를 두었는데 장자인 승 손의 자(字)는 우약(友若) 호는 해루당(奚陋堂)으로 1440년 (庚申)에 태어났다. 진사시에 오르고 통례원 좌통찬(通禮院 左通贊)에올라후손들은통찬공문중으로세계를이룬다. 차남 승손(承孫)의 자(字)는 문약(文若) 호는 치와(癡窩), 1453년(단종 癸酉)에 태어났다.세조조에진사시에올랐으며, 후손들은 치와공 문중이라고 하고 또는 후손들이 경주 손곡 동에이거하여세거지를정함으로서손곡문중이라고도한다. △통찬공파(通贊公派) 통찬공은 감헌공의 장자 휘 문손(文孫)으로 하여금 문호가 열린다. 호가 해루당인 휘 문손은 선조의 음덕(先蔭)을 이어 받아 재기(才器)가 매우 뛰어나더니 일찍이 사마시(司馬試) 에 급제하고 관직이 통례원 좌통찬에 이르렀다. 통례원은 조 선시대 국가의 의식을 주관하는 관청으로 좌통찬은 정3품 당 하관의관직이다. 일찍이 동향의 점필재 김종직 선생으로부터 우의(友誼)가 좋아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였다.고을 풍속이 떨치지 못 함을 걱정하여 향사(鄕社)의 여러분으로 더불어 옛적 의장 (義庄,일정한 토지를 마련하여 거기에서 나는 것으로 친족을 돕거나 빈민을 구제하는 것)의 법을 본떠서 의재(義財)를 설 치 향속(鄕俗)을 떨쳐 일으키니 점필재 선생이 ‘밀양향사 의 재기’ 기문을 지어 다음같이 서술하여 칭찬하였다. 뷺우리 고 을에 전통례문의 통찬 박후(朴候븡소속관서의 長의 존칭) 文 孫이 하루는 좋은 일이 있다는 둣이 나의 싸리문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이 고향 마을을 소중하게 여기였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다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말하기를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앞서지도 아니하고 뒤서지 도 아니하며 한 세대를 같이 한다면 어찌 행복이라 하지 않겠 는가. 이미 세대도 같고 또 나라도 같으며, 또 고을도 같으니 그행복할이야누군들크다하지않으리오븣.뷻 사화가 일어나기에 공께서 점필재를 종유한 이유로 마침내 연좌되어 참화를 당하였으니 때는 갑자년(1504년)이었다. 무 오년에 연산군은 유자광이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김종직의 븮조의제문븯은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며 유자광은 고 자질하며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를 꾀했다며 김종직과 그의문인들을대역죄인으로규정하였다.이미죽은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았 다. 또한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 다는 죄로 많은 사림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으며, 다시 갑 자년에는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복위문제를 들추어 훈구 세 력을 제거하는 과정에 통찬공과 이조좌랑에 있었던 아들 성 무(成武)까지 화를 입은 것이다. 후에 통찬공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통찬공의 아들 성무(成武)의 자(字)는 부오(夫吾) 호는 오 려(吾廬),1456년(丙子)에 태어나 이조좌랑을 지냈다.무오사 화에연좌되어화를입었다. 오려공은 아들 밀(密)·찰(察)·채(寀)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밀(密)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에 오르고 학행이 뛰어났 으나 갑자사화를 피해 경남 함양으로 몸을 숨겼다. 차자 찰 (察)또한지평으로조산대부훈련원첨정인아우 채(采)와함 께사화를피해청도·하양등지로몸을숨겨세상을멀리했다. 오려공의 장자 밀(密)은 사헌부 지평으로 학문이 뛰어났으 며, 숭인(崇仁)·숭의(崇義)·숭례(崇禮)·숭지(崇智)·숭신(崇 信) · 숭문(숭문) 등 6형제를 두었는데 첫째 숭인(崇仁)은 진 사시에 올라 첨정이다. 그의 아들 휘 강( 겨)의 자(字)는 인보 (仁輔) 호(號)는 모송헌(慕松軒)으로 선릉참봉이고, 참봉공 의 아들계생(繼生)은훈련원주부로 임진란에 사망했다.주부 공은 광우(光佑)·덕우(德佑)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광우는 금정도찰방, 차자 덕우는 무과에 올랐으나 상세한 이력은 전 해지지않는다.금정도찰방휘광우의9대손동수(棟洙)는아 들 병형, 병규 병국 삼형제를 두었는 데 장 자 병 형 (柄 馨 )은 후 사 가 없 어 아우 병규(柄圭)의 장자 홍희(洪熙) 로 하여금 대를 이었으며, 홍희(洪 熙)는 기철(基喆)을 낳았는데 字는 현철(賢喆) 적명은 진원(眞元)으로 감헌공의 주손이자 신라시조왕의 65 세 주 손 이 된 다 . 지평공의 둘째 숭의(崇義)의 자 (字)는 성강(性剛)으로 생원으로 아 들 영수(榮秀)는 문과 수찬이고 손자 용손(龍孫)은 진사, 증손 억견(億堅)은 부산첨사, 현손 응생 (應生)은통덕랑이다. 지평공의 셋째 숭례(崇禮)의 자(字)는 성례(聖禮),문과 승 문원 정자이고 아들 주(胄)의 자(字)는 대지(大之), 호는 모 와(慕窩)이다. 지극한 효자이다. 1546년(명종 1)에 태어나 21 세에 등제(登第)하여 임천(林川) 이산군사(以山郡事)(理山 郡守)를 지냈다.어릴 때 부터 성효(誠孝)가 독실하고 양친 상 을 당하여 여묘(廬墓)6년 중에 밤마다 범이 와서 호위 하였으 며,매 열흘에 어머니께 문안하여 귀가 할 때면 뱃사공이 노를 잡고 대기 하였다. 복상 기간이 끝나자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은거하여 슬픈 마음을 품고 항상 부모님을 그리워 하는 생각을 가졌다. 별세한 뒤 원근의 사림(士林)이 정문(呈 文)하여 순효(純孝)로 1609년 정려가 내려졌다. 모와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 맹원(孟元)은 문과로 진 주판관을 역임하 였으며, 그의 아 들 등(登)은 무과 첨사, 손자 극룡 (克龍)은 통덕랑, 증손 기남(基南) 은 호군(護軍)이 다. 모와공의 차자 맹하(孟夏)는 무 과 선전관이고 그 의 아 들 윤 (倫 )은 장령, 손자 삼성 (三省)은 장례원 판결사이다. 지평공의 넷째 숭지(崇智)의 자 (字)는 세일(世 一), 무과에 올라 한성판윤을 지냈다. 판윤공은 아들 후신(厚 信),기현(耆賢)을 두었는데 장자 후신은 문과에 올라 홍문관 정자(通訓大夫 弘文館 正字)직에 재직 중 사화와 파당 등을 지켜보고 앞으로 다가올 참혹한 현실을 직감하여 관직을 버 리고 가솔(家率)과 가재도구 등을 범선(帆船) 3척에 싣고 제 주도로 세거지를 옮기고 은거하며 성리학을 탐구하며 여생을 보냈다. 정자공의 아들 덕기(德起)는 장사랑(將仕郞)이고 손자 의 (義)또한 장사랑(將仕郞),증손 효업(孝業)은 조졸하여 부인 김해김씨는 청상으로 선세(先世)의 유업을 숭봉하고 입도조 정자공을 비롯 아버지 교지 등을 소중히 보관하는 등 선조의 음덕이후세에전해지도록엄한교육을통해가정을이루었다. 현손 근생(根生)은 아들 삼형제(지엽·지번·종엽)를 두면서 크게번성한다. 그리고 입도조 정자공의 입도조의 9세손 세호(世豪)公의 후손으로 조직된 세호공계 문중, 7세손 홍륜(弘崙)公의 수산 문중, 6세손 지번(枝蕃)公의 농포 지번공 문중, 9세손 귀선 (貴先)公의 만적공계 문중, 8세손 항인(恒仁)公의 항인공계 친족회, 9세손 성형(聖亨)公의 성형공계문중으로 크게 분파 되어세계를이룬다. 지평공의 넷째 숭지(崇智)의 차자 기현(耆賢)의 아들 한문 (漢文)은남해현령을지내고아들석년(碩年)을낳았고,석년 은탄복·원필형제를두었다. 지평공의 다섯째 숭신(崇信)은 무과 첨사(僉使)인데 아들 성림(聖臨)을 낳았고, 성림의 아들 충사문을 낳았고, 사문의 아들 기(忠起)는 동지중추부사, 손자 이만(以萬) 동지중추부 사로부자가동지중추에올랐다. 지평공의 다섯째 숭문(崇文)은 중추(中樞)이고, 아들 성인 (聖仁)은진사이다. 오 려 공 휘 성 무 (成 武 )의 차 자 찰 (察 )은 문 과 지 평 으 로 아 들 경운(慶運)을 경운은 선(璇)을 낳았는데 그의 아들 시증(時 增)은 조봉대부 호조정랑으로 선조 송은 선생의 문집 간행과 현창사업에주력했다. 오려공의 셋째 채(寀)의 字는 군오(君吾) 호는 향산(香山) 으로 1491년(辛亥븡성종22)에 태어났다.문장과 학행이 뛰어나 세칭 향산옹(香山翁)이라 한다. 조산대부 훈련원 첨정을 지냈 다. 그의 아들 경진(慶進)은 선공감역, 공조좌랑 부수찬, 손자 의로(義老)의 자(字) 덕수 호는 모당(慕堂)으로 한성판관, 수 찬, 호성원종1등공신으로 그의 아들 태진(泰鎭)의 호는 지지 당(知止堂)으로 1664년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보덕,손자 은 수(殷수)는통덕랑이고,증손언룡(彦龍)은통정대부이다. △치와공파(癡窩公派) 치와공파 감헌공의 차자 승손(承孫)으로부터 문호가 열린 다. 치와(癡窩)는 휘 승손의 호(號)이다. 치와공의 자(字)는 문약(文若)으로 단종 계유년(癸酉年븡1453년)에 태어나 세조 조에진사시에올랐다.점필재김종직의문인으로 경사(經史) 에박학(博學)하였으며,은거(隱居)하여의(義)를지켰다. 치와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 연생(連生)의 자(字)는 덕부(德夫) 호는 송오(松塢) 또는 백오(柏塢라 한다. 지극한 효행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이다. 차자 연동(連東)은 현감인 데7代에이르러무후(无后)이다. 효자 동몽교관 휘 연생은 아들 광영(光榮), 계영(戒榮)을 두었는데 장자 광영은 아들 열(悅)·종(悰)에 이르러 무후(无 后)이고, 차남 계영(戒榮)의 자(字)는 경보(敬甫), 호(號)는 서은(西隱)이고, 그의 아들 효달(孝達)의 자(字)는 성언(誠 彦),호는 숭산(崇山)으로 품성이 순수하고 학행이 뛰어나 정 릉(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의 능) 참봉이고,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아들 사익(仕益)을 낳았는데, 사익의 자는 익지(益 之)호는송려(松廬),인조조때무과에급제하여훈련원판관 이 되었고, 1637년(丁丑)에 능원대군을 모시고 좇아 척화(斥 和)를 돕다가 곧 강화(講和)소식을 듣고 눈물을 뿌리면서 고 향에 돌아와 벽에다 대명(大明) 두 글자를 써서 걸고 조석으 로 바라보면서 절을 하고 벼슬길엔 나아가지 않았다. 절구 한 수를 지어 이르되 “소하(소국) 삼천리가 일시에 더러운 먼지 로 뒤 덮였구나, 슬프도다. 이(利)만 좇아 내닫는 무리여, 나 만 이에 숭정인(崇禎人)이로구나.”하였다. 판 관 공 휘 사 익 의 아 들 의 일 ( 義 日 )은 경 주 서 면 아 동 (雅 洞 ) 에서손곡동으로이거하고아들실옥(實玉),영옥(英玉)을두 었는데 장자 실옥(實玉)의 아들 만웅(萬雄)은 수직으로 동중 추에올랐다. 의일의 차자 영옥(英玉)은 아들 만흥(萬興), 만기(萬杞), 만태(萬泰)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만흥의 호는 지당(智堂) 으로 일찍 경사(京師, 서울)에 유학하여 문사가 숙취하고 경 사에 박통(博通)하였으나 공명을 멀리하고 귀향하여 산자수 려한 곳에 정자를 짓고 요수재(樂水齋)라 하였다.종세(終世) 토록 산수를 즐기며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정성을 다 해참되고실속 있도록 힘써(誠敬務實)사림의 천거로 사후에 학행으로통훈대부군자감정에증직되었다. 슬하에 세운(世雲),세혁(世爀),세검(世儉)삼형제를 두었 는데 모두 효우(孝友)가 깊었다. 장자 세운의 호은 인당(仁 堂)으로 사온서 직장을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유 명(遺命)을 받들어 요수재를 크게 짓고 도의(道義)를 강론하 고세상엔나아가지않았다.호조좌랑에추증되었다. 치와공 문중의 후손들은 이밖에도 학행과 덕행, 효행으로 문중을 크게 빛내 경주 지역 토호성씨로 발돋움하게 되었으 며, 호조좌랑 세운의 6대손 태진(泰鎭)은 신라시조왕 이후 2 천여년 종사와 계파 내력을 일목요연하게 집대성 했다. 그의 호(號)는 만오(晩悟)1870년 경오생이다.일찍 경사에 수학하 여 1895년 법부주사로 임관하였다. 1903년 당시 국정적폐에 비분강개하여 의연히 낙향하여 일생동안 정성을 다해 위선만 은 진력하여 시조왕 전묘와 왕비 사적개수, 밀성대군 설단, 밀 성대보,파보,총보,각관대동보와 지당실기,국조출치록,청구 호구와 선묘에 수갈하고 요수재 중건의 역사에 성력을 기울였 다. 특히 전국에 흩어져 있던 박씨문헌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 하여팔도강산을누비며10여년동안모은자료를책으로간행 했다.책은시조왕역년기와전묘사실부터봉군,상신,장신,충 신,유일,경사,절의,공훈,은둔,문행,효행,열녀 등으로 자세 히분류하였다.또다시국혼,시호연원,사원제편으로별록삼 아 일년만에 열람과 교정을 마치고 상재하니 실로 불후의 대 작이라 박씨종친이 이구동성으로 공감하는 사실이다. 경술국 치 후 일제강점기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오직 숭조애종으 로일관하시어국혼을바로세우는온심력을다했다. 감헌공의 후손들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갑자사 화에 화를 당하면서 깊숙이 은거해 많은 사료와 묘소 등이 실 전되는뼈아픈문중사를갖고있다. 감헌공의 아들 해루당공 휘 문손(文孫븡통례원좌통찬)과 치 와공 휘승손(承孫)이점필재와교유(交遊)하고그의아들 성 무(成武, 오려공)는 문인으로 갑자사화에 연좌되어 온 집안 이 사화를 피해 어찌할 바를 몰라 장자 밀(密)의 집에 간직되 어 전하던 송은 선생의 영정과 시찬(試鑽), 시첩(諡牒) 등을 그 아우 찰(察)에게 맡기고는 고향인 밀성의 사포( 숍浦븡현 부 북면 후사포리)로부터 멀리 함양으로 떠나 숨어 버리게 되어 묘소에 향화(香火)를 오래도록 받들지 못하게 되자 외손 신 (申)씨들이 임시로 대신 향사를 올리게 되었으니 무릇 300년 이었다. 1835년 10월에 후손 석규(錫奎, 보명 漢坤), 석종(錫宗, 보 명 台坤)종형제가 비로소 더듬어 찾아 해루당(통찬공), 오려 공(휘성무)의제사를받드니신씨들이완문을지어주고돌아 갔으니이는화고(禍故)의여파와침체의오램으로빚어진결 과였다. 오려공의 장남 밀(密)은 장자 숭인(崇仁)과 함께 함양의 지 리산 깊숙한 곳으로 은거하게 되고,숭인의 아들 강은 다시 산 청 봉곡으로 이거했다. 봉곡은 현 산청군 생초면 노은리 마을 로 첩첩산중이다.산청 입향 이후 후손들은 인근 차왕면,거창 등으로 이거해 가고 일부는 산업화에 따라 서울 등 외지로 나 가면서 구심점이라 할 수 있 는 종 중 구 성 마 저 힘 들 어 진 상 태 였다. 설상가상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그 세는 더욱 약 화되어 현재는 몇 가구 남지 않은 상태로 시조왕의 65세 주손 되는 기철(基喆븡적명 眞元) 현종이 경남 양산에 거주하며 고 향산청의선영을지키고있다. 지평공의 차남 숭의(崇義)는 합천 도사동으로 은거했는데 현 묘산면동곡리이다.삼남 숭례(崇禮)는창녕군영산면으로 은거한 이후 효자 모와공(휘 주)의 9세 사일(思一)·사복(思 福 ) ·사 득 (思 得 ) 등 이 창 녕 에 서 선 조 송 은 선 생 의 분 묘 (墳 墓 ) 가 있는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로 1830년 이거해 오면서 오랜 세거지가된다. 지평공의 사남 숭지(崇智)의 장남 후신(厚信)은 통훈대부 홍문관 정자(通訓大夫弘文館正字)직에재직 중 세화의 참혹 함을예건하여관직을버리고가솔(家率)과가재도구등을범 선(帆船) 3척에 싣고 곽지포구로 입도 정자천(正字川) 상류 인 애월읍 어음2리 1744번지 주변에 정착한다.정자천은 애월 읍 금성리와 함림읍 귀덕리 사이를 흐르는 금성천이며 인근 주민들 사이에 정지내로 불러져 왔는데 이는 상류의 정자왓 과 더불어 입도조 박후신의 직함 정자공에 기인한 것이며 현 재 정착지 부근의 지명도 정자왓으로 불러지고 있고 부근의 지명에 박별지동산(朴別紙童山),손청(손님을 모시는 곳),매 매기터(생활용품을 매매하는 곳)라는 곳이 있으며 1988년 제 주대학교 이청규(李淸圭) 교수의 고고학 연구팀에 의한 유허 지 발굴조사에서 고려청자, 이조백자, 분청사기편등이 다량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과 지명에 대한 연관성을 추정한바 있다. 특히 제주에 정착 후 제주도의 토착성씨 고(高)븡양(梁) ·부(夫)씨의 세 성씨와 더불어 살아오는 동안 후신(厚信)公 의 후손들은 대대로 학문을 탐구하고 후학을 육성하는 선비 의 가문으로,지금은 남자후손 기준 약 3,400여명으로 번성 명 문거족으로서의 기반(基盤)을 갖추고 지평공(휘 밀)의 다섯 째숭신(崇信)은함양으로,여섯째숭문(崇文)은통영으로각 각은거해갔다. 오려공의 차남 찰(察)의 후손들은 경북 경산, 김해 등으로, 오려공삼남채(寀)의후손들은경북경산진량읍에세거한다. 감헌공의 차남 승손(承孫)은 점필재 문인으로 연좌되어 화 를 입 었 다 . 이 에 그 의 손 자 계 영 (戒 榮 )이 밀 양 삽 포 에 서 영 천 으로 이거했고, 그의 손자 사익(仕益)은 다시 경주 내동으로 이거했다.그리고그의 아들 의일(義日)은손곡동으로 이거해 손곡의요수재를중심으로집성촌을이루고있다. 손곡으로 이주한 후손들은 이후 포항 장기면으로 이주하는 등경주인근지역에산재해있다. △보본재(報本齋)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필방 소재 보본재는 송은 박익 (1332~1398) 선생의 재사이다. 후손 감찰 정원(鼎元)과 진사 윤덕(潤德)의 주창으로 묘 아래에 1794년(정조18)에 민가를 구입하여 1803년(순조3)에 개수하고 보본재(報本齋)라 편액 하였으며, 1857년(철종3)에 중수하였고, 1925년(乙丑)에 구 사(舊舍)를철거하고중건일신(重建一新)하였다. △모우재(慕優齋)와경모재(景慕齋) 모우재는 청도면 고법리 보본재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우 당공(휘 융~1424) 선생의 재실(齋室)이다. 모우재는 전신(前 身)은 무안면 중산리 소재 경모재(景慕齋븡통찬공 재실)로 20 05년 해체하여 이건 및 중건했다. 경모재는 통찬공(휘 문손븡1 440~1504)의 묘 아래 재숙소로 창건되었는데 오랜 세월에 퇴 락하여 후손들이 1980년 중건하였다. 그후 2005년 이건하여 모우재우측에다시창건하였다. △모와재(慕窩齋) 모와재는 모우재 옆에 있으며, 모와공 박주(1546~1604) 선 생의 재실이다. 모와공의 9세 사일(思一)·사복(思福)·사득 (思得) 등이 창녕에서 선조 송은 선생의 분묘(墳墓)가 있는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로 돌아오면서 모와공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1978년창건하였다. △이산군사박주정려(旌閭) 이산군사 박주의 효자각은 청도면 고법리 필동마을 입구에 있으며, 모와공 박주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16 09년(광해1) 정려가 내려지고, 1710년(숙종36) 그가 살았던 창녕 부곡에 세웠는데, 1903년(고종40)에 실화로 소실되어 1 909년(순종3)에 후손들의 청원으로 현위치로이건한정문(旌 門) 이다. 1979년 정부 보조금으로 중수하고, 2008년 재 중수 했다. △요수재(樂水齋) 요수재는 지당 박만흥(1678~1742)의 강학지소(講學之所) 이다.1925년중건하였는데 당호(堂號)를 요수재라 함은 공자 의 ‘지자요수 인자요수(知者樂水 仁者樂山), 즉 지혜로운 사 람은 움직이고, 인자한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 겁게살고,인자한사람은장수한다는뜻에서취했다. 요수재 장판인 지당실기(56장, 능화판 1장)와 박씨문헌록 (226장)이 세계기록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해 2015년 10 월 9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요수재 앞에 기 념비를 세웠으며, 박씨문헌록의 저자 만오공(휘 태진)의 공 적비가있다. 감헌공파는 우리 종중사의 뼈아픈 역사로 남는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산군 폭정의 최대 피해자인 셈이다. 사 화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져 살면서 생사마저 알 수 없 었 고 , 묘 소는 실전되어 향화마저 받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후손들 은 각 지역에서 선조의 유풍을 살리고 후학을 기르는 일에는 앞장서면서지역의토호세족으로자리를잡아갔다.강직한성 품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대항했고, 한편으로는 공명을 멀리 하고 낙향하여 선비로서 아름다운 길을 택하기도 한 선조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후손들의 삶 속에서 박성 종가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밀양 청도면 고법리에서 선조 송은 선생의 유택 을 지켜나가고, 박성의 본고장 경주에서 또는 멀리 제주에서 지역의 토속성씨들과 함께하며 그 우월성을 보여주고 있어 감 헌공파종중이박성의종손가로서가치를새롭게조명받는계 기가되기를기대해본다. /글븡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6면에서계속 제주문중회관 제주입도조정자공묘(뒤)와아버지후신제단 모우재전경(왼쪽건물이 경모재이다) 모와재 박주효자정려 요수재전경-경북 경주시손곡동282번지 요수재정당 박진원주손 (시조왕65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