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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31일 월요일 7 (제164호) 기 획 이순신 장군이 멀리 함선에서 전황을 보고받고, 광서를 직 접 불러 격려하고는 함안은 산세가 낮고 평지가 많아 왜적과 싸우기는 불리하니, 관군에 편입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일 조하라는 권유로 초유사 김성일 휘하에서 군무를 보고 있던 중 11월 초,합천에서 관군을 지휘하고 있던 권율 장군이 급히 불러 청년 장교로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15 94년 무과에 급제하여 도원수 권율 장군 휘하에서 종군하였 으며,전란 7년간의 수많은 전공으로 조명(朝命)이 일곱 번이 나내려졌다.전란후선무원종2등공신에오르고1599년 용궁 현감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明븡淸 교체시기에 조선의 서북 방을방어하는장수로서중책을맡았다.明나라는淸나라와의 전쟁에서 임진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분을 들어 조선에 군 수 물자를 요청하였다.이에 조선은 광서 박진영을 운향사(運 餉使)로 삼아 군수물자를 공급하였는데, 광서공은 정성을 다 하여 처리하였다.또한,明나라 유민 수만 명이 조선의 국경을 넘어와 유리걸식하며, 도적질을 일삼았다. 광서공은 이들 모 두를 구휼하고, 상벌을 엄격히 하여 유민들을 관리하였다. 이 에 대한 공노로 明나라로부터 감사장인 장려패문( 鴉勵牌文) 을하사받았다. 광서공이 한가할 때는 금서(琴書)를 벗 삼아 풍류를 즐겼는 데,간송 조임도 선생이 광서공의 거문고 켜는 소리를 듣고 청 박통판진영탐금(廳朴通判震英彈琴)시를 남겼다. 븮松風響肅瑟(송풍향숙슬) 솔바람 소슬하게 들리는 듯/ 石 潤嗚골켑 (석윤오경장)바위틈 시냇물 졸졸 흐르듯/誤疑坐林 壑(오의좌림학) 숲속 골짜기에 앉은 양 착각에 빠졌고/ 不知 琴在傍(부지금재방) 거문고 옆에 있음을 알지 못 하네/ 我愛 朴通判(아애박통판) 내가 박통판을 아끼는 건/ 不與世奔忙 (불여세분망) 세상 어지러운 일에 관여하지 않아서이지/ 所 以古雅音(소이고아음)그래서 옛날 아음을 연주하면/入耳皆 峨洋(입이개아양)귀에들어오는아양곡이라네븯 1624년 경흥도호부사 재임 시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 을 품은 이괄이 영변에서 난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궁궐을점령하여인조는공주로파천(播遷)을가게되었다. 이때 광서공은반란군을진압하는데별장으로 출전하여이 괄 진영의 이윤서 장군과 막역한 사이였는데, 그에게 밀서를 보내어 뷺대의명분에 따라야지, 반란군과 뜻을 같이 하면 후 세에 역적으로 기록될 것인데, 속히 병사를 이끌고 귀순하라 뷻고 권유하자 이윤서는 새벽에 병사 3천명을 이끌고 귀순하 였다. 궁궐에 난입한 반란군을 정충신, 남이홍 장군과 더불어 한양 신교(新橋, 갈마재)로 유인하여 대파하였다. 광서공은 사전에 두 아들 유룡,임용을 신교에 매복케 하여 퇴로를 막고 반란군을 섬멸하여 난을 진압하게 되었다. 난이 진압된 후 아 들 유롱,임룡과 삼부자(三父子)진무원종1등 공신에 책록 되 었 다 . 광 서 공 은 그 후 잠 시 공 직 에 머 물 다 낙 향 하 였 는 데 고 향 을돌아오면서자신의생각을아래와같이읊었다 븮平吳由聖主(평오유성주) 오를 평정함은 성주를 말미암고, / 擒蔡賴群公(금채뢰군공) 채를 사로잡음은 공들의 덕이라./ 匹馬歸田里(필마귀전리) 필마를 타고 향리로 돌아가서는,/ 高眠大樹風(고면대수풍) 큰 나무 아래서 바람 쐬며 쉬리./ 雪 涕扶鸞駕(설체부란가) 눈물 흘리며 어가를 모시다가,/ 如今 返舊都(여금반구도) 지금에야 옛 도성으로 돌아왔네./ 時平 無一事(시평무일사)때는 평정되어 아무일 없으니,/臣亦臥江 湖(신역와강호)신하또한강호에서편히쉬리.븯 광서공은 낙향 후 금서(琴書)를 벗 삼고 후학을 양성하던 중 60세(歲)에 병조판서 김시양이 인조(仁祖)에게 아뢰어 뷺이괄의 란 때 광서 박진영의 공이 으뜸인데, 봉작에 누락되 어 안타까워하는 이가 많습니다뷻라고 하자 인조는 광서공을 병조참판에제수하였으나,나아가지않았다. 1636년 청나라가 침입(병자호란)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 로 피신하였는데, 이때에 무숙공은 68세(歲)의 노구에 의병 을모아아들임룡과남한산성으로향하던중조령(추풍령)에 서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에 비분통곡하고 광려산 하로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다 1641년 7 3세(歲)의일기로졸(卒)하였다. 광서공 사후 1642년 인조(仁祖)때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증 직되고,효종(孝宗)원년(1650)에 숭정대부 판돈령부사(崇政 大夫判敦寧府事)에증직되었다. 정 조 ( 正 祖)가 직접 편찬한 존주 록 ( 尊 周 錄 ) 에 “병 란 (丙 亂)때 영남 에서 의리를 지킨 사람은 동 계 정 온 (鄭蘊)과 광 서 박 진 영 뿐 ” 이 라 고 하였다. 광서공은 우리 역사에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충절(忠節) 로일관(一貫)한용장(勇壯)”으로기록되어전해지고있다. 1871년 7世孫 만성공 휘 치복(致馥)은 광서공의 행적을 조 정에 주달하여 시호 무숙(武肅)을 하사하고, 국불천위(부조 묘)에 봉해졌다. 1880년 삼황대보단에 배향되었다. 광서공의 7世孫 휘 치복은 광서공의 유집 븮광서실기븯(匡西實記)를 편찬 하였다.2014년 남명연구소에서무숙공의행적재조명학술대 회를 개최하고 븮무숙공 박진영 그 애국의 삶을 조명하다븯를 간 행하였다. 동천공의 맏사위는 사천군수 신압(申 石+由)으로 2차 진주 성 전투에서 순국하였고, 둘째 사위 양산군수 이달(李達)은 임란때창의하여공을세웠다. 동천공의 아우 남( 도)의 호는 검계(儉溪), 의학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 후손들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양생법(養生法)을 연구하였으며, 퇴계선생이 엮은 활인심방(活人心方)의 양생 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직접 해설을 달고 독자적인 견해를 덧 붙여 아들에게 전했다. 그의 아들 풍영(豊英)은 아버지 검계 공의 뒤를 이어 활인심방에 심신행의 묘안이 담긴 고경중마 방(古鏡重磨方)더하여 아들 선용(善龍)에게 전했으며 이는 손자 창근(昌根)에 이르러 정점을 찍어다.활인심방의 원리를 활용하고 고경중마병을 실천하며 밤에는 혼자 조용히 앉아 원효대사의 백골관좌수행법을 꾸준히 닦아 ‘인생칠십고래희 븯(人生七十古來稀)라는 당시는 보기 드문 여든 살까지 장수 하였고 학발(鶴髮)이 날리는 풍모는 신선과 같았다. 공의 덕 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제자들이 찾았고, 조정에서 그 덕 행을기리기위해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에가자했다.특히선 대로부터 내려온 모든 것이 자녀들에게까지 전해져 한 가문 에3대5명이통정대부첨지충추부사라는은전을입었다. 무숙공은 슬하에 9남 7녀를 두어 영동정공의 후예 중 제일 번성한다. 함종어씨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장군의 손녀와 혼인하고 그 아들 형룡은 현풍곽씨 낙수 衛國(위국), 손자 창 억은 함안조씨 조종도 선생의 현손녀와 혼인을 하면서 함안 지역의토반으로서입지를공고히하게된다. 무숙공의 장자 형룡의 호는 완석당(完石堂)으로 어렸을 때 에는동명(東溟)김선생에게 늦게는 미수허목(許穆)의문하 에서종유하여도의를강마하였다.조종에서 누차 기린(麒麟) 찰방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친상(아버지)에 3년 간 시묘하였고, 국휼(國恤,국민 전체가 복상을 하는 왕실의 초상)에도3년을술과고기를금하였다.충효학행이탁이하여 사헌부지평을 제수 받았으며, 다섯째 아들(창조)의 귀로 대 사헌에 증직 되었다. 그의 다섯째인 휘 창조(昌兆)는 향민 구 휼에 앞장서 향당이 공의 후덕을 칭송 감복, 증 가선대부동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상절(尙節)의 호는 자고당(紫 皐堂)으로 통덕랑이다. 성호 이익 선생 문하에서 종유하였으 며,문학(聞學)이정심(精深)하고효우가돈독하여고을원으 로부터 표창과 도계(道啓,감사) 로서 두 번이나 재랑(齋郞)에 천 거되었다.영조 무신란에 창의하 여 역적을 치고 거의 토적의 격 문을지어그죄를성토하였다. 븮痛矣桐溪老(통의동계노) 슬 프도다!동계 어르신이여,/那知 有賊孫(나지유적손) 역적 손자 가 있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 / 擧頭看白日(거두간백일) 머리 를 들 어 밝 은 해 를 보 니 , /所 愧 彼 蒼存(소괴피창존) 부끄러운 바 가저하늘에있군요?븯 아버지 중추공과 함종어씨 함 원부원군 유구(有龜: 景宗의 장인)와의 서간에 공의 학문을 크게 칭찬하였고, 외고조부 어영담 장군의 가승(家乘)에 전 (傳)하여 함종어씨 족보에 등재하게 하였다. 구보에 문집이 전해진다 하였으나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무숙공의 용화 유범행적(龍華遊泛行蹟)인 기락편방(沂洛編芳)을 편찬하여 전해진다.용화유범은 한강 정구 선생의 문인들과 제자들이 1 607년 2월 함안의 낙동강 上에서 선유(船遊)하고,강론(講論) 하는 회합을 열었는데,이 때 참여한 선비들은 망우당 곽재우, 여헌 장현광, 함안군수 박충후, 무숙공 박진영, 간송 조임도 등 지역의 제현 35인이 참여하는데, 한강 선생은 제현들에게 전란 후 지역의 민심을 잘 보살펴 전란 이전의 평화로운 시절 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노력을 해 줄 것을 당부하고, 즉석에서 용화산화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을 작성하였다. 그 동범록 을 간송 조임도 선생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자고당 공 이 보고 제현들의 행적을 수십 년간에 걸쳐 찾고 다듬어 1755 년 븮기락편방븯을 간행하여 후손들에게 제현들의 미행(美行) 을 알게 하였다. 그 후 제현 후손들은 모현계(慕賢契)를 결성 하여 300여 년간 매년 모임을 이어가며 돈독한 우정이 이어지 고있다. 무 숙 공 의 셋 째 아 들 부 원 수 공 휘 임룡(任龍)은 효종(1658) 때 2차 나선벙벌(羅禪征伐)에 부원 수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워 淸 나라 황제를 대면하게 되었는데 이 때 황제가 감사의 뜻으로 그 대의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니, 공이 귀한 서적을 갖고 싶다 하 였다. 황제는 다섯 수레의 서적 과 조선의 조정에 이자하여 벼슬 을 몰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 은 병조참지에 잠시 머물다 학문 을 강 마 하 고 자 허 미 수 선 생 의 문하에서 종유하였으며, 만년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서적 일 만권의 서적을 무숙공 종택에 ‘만권루’라는 서고를 만들어 후손과 지역의 선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개인이 일 만권의 서적을 보유하 는 것 은 지 금 도 서 량 으 로 추 정 해 보 면 십 만 권 정 도 의 수 준 으 로보아진다. 이처럼무숙공의후예들은국가가어려움에처했을때는분 연히 일어나 충의 실천하고 향당에서는 모범을 보이며 학문 을 강마하여 전하고, 가정에서는 효를 실천하고 형제간의 돈 독한우애를보여주고있다. 특히 무숙공의 7世孫 만성공(휘 치복)은 20세 전후에 문장 으로 세상에 나타났으며,약관에 퇴계학맥의 정재 유치명(定 齋 柳致明) 선생에게 배워 유학의 근본인 경서를 통독(通讀) 하여 도학(道學)을 연마하였고, 늦게는 성호학맥(星湖學脈) 을이은성재허전(性齋許傳)선생에게종유하여치국안민의 실학을 습득하고 엄연히 일방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또한, 남명 선생의 후학들과 학문적 소통이 원활하였고 남명의 추 숭사업을 충실히 하였으며, 남명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 하는 등 퇴계와 남명을 아우르는 사상을 보여 주었다.성재 선 생이 임종을 앞두고,만성공에게 “성호와 순암을 통해서 전해 진 학문의 연원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힘쓸지어다.”라고 하고, 평생 동안 지은 책을 맡기면서 잘못된 것을 고정(考訂) 하도록했다. 경신(1860)년에 경남 합천 삼가현(三嘉縣)의 황매산(黃梅 山)으로 들어가 서당을 열어 강학하였다. 원근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시냇가 집에는 수용할 수가 없게 되 자, 백련재(白鍊齋)를 지었는데, 거기에 거처하면서 학업을 닦는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븮소학븯(小學)으로 가르침을 베푼 점필재 김종직의 남긴 정신을 본받아 븮소학강규븯(小學講 規)를 만들어 여러 학생들을 독려했다. 7리 이내에 사는 나이 오십 이하인 사람으로서 조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이 강규에 의거해서 공부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마다 그 과제로 준 것을 점검했고, 출입하는 일, 나가고 물러나는 일, 위의(威儀)와앉고일어나고하는것에이르기까지도모두바 로잡고 타일러 인도하여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와 외우는 공 부이외에참된것에가까운학문이있다는것을알게했다.몇 년사이에강우의유림의기풍이확바뀌었다. 1871년 七代祖 광서공(匡西公)에게 시호를 내리는 예전을 받았다.특히 선생이 남긴 유고 븮광서실기븯(匡書實記) 븮차록독 서븯(讀書箚錄), 븮어류답문븯(語類答問), 븮대동속악부븯(大東俗 樂府), 븮시문븯(詩文) 10여권 등은 진주 경상대 문천각에 ‘만성 문고’에 비치 보존 관리되고 있다. 선생의 아들 호선(祜善)은 1896년 븮만성문집븯 13권을 간행하였고, 손자 영철(永喆)과 조 카 정선(正善)은 1925년 븮만성문집븯을 보완하여 16권과 부록 2권으로간행하였다. 2007년 함안군에서 선생의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븮만성 박 치복의학문과사상븯을출판하였다. 선 생 의 조 카 연 암 (淵 庵 ) 정 선 (正 善 )은 소 눌 노 상 직 (盧 相 稷)선생의 제자로 선생을 모시고,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9년 파리강회회담 유림대표의 一人으로 참여하였으며, 항일독립운동을 국. 내외에서 전개 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유공자로 지정되었 다. 무숙공 9世孫 한홍(炯柱)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가 크게 성공을 이루고, 재일교표 거류민단에서 활동하면서 화 수회를 조직하여 교포 후손들의 뿌리를 찾는데 노력하였으 며, 수십 년간 고국을 왕래하면서 쓰러진 문중을 재건하기 위 해 선조유적보존회를 설립하여 일가들을 독려하고, 문중의 재각과 선조 묘비를 건립하고, 종답을 마련하여 선조 현창의 중추적역할을하였다. 1979년 무숙공 종택에 보존하던 유품,고문서 등 231점이 경 남도 유형문화재 103호로 지정 받았고, 2005년 국집진주박물 관에 문중의 고문서 1,203점을 기증하였다. 2008년 국립진주 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를 복원하여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고 도록『임진왜란의병장박진영과그 후손들』을간행하였다.20 18년 영동정공파보를 35년 만에 중간하여 일가들 간 돈목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영동정공의 후손들은 100여 년 전부터 선조 현창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으며, 문중의 역사를 계승하기 위해 대를 이어가면서많은노력을하고있다. 이상과같이영동정공파의문중내력을보면나라가어려울 때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선 행적 을 알 수 있으며, 조선 말 만성공은 문중의 역사와 족보를 체 계적으로 정립하여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훌륭한 행적을 후손 들에물려주었다.일제강점기와한국전쟁을전후하여어려운 환경 여건에도 불구하고 선조님들의 고귀한 역사를 보존하고 계승하는데심혈을기우려왔음을알수있다. 한편,영동정공파는 영동정공의17世에 이르러 자(字)또는 호(號), 관직을 따 21개 소 문증으로 구분하여 종사를 운영하 고 있다. 무숙공을 비롯한 선조들의 현창사업에 앞장서면서 밀성대군 후예 문중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종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평이 이어지면서 각 문중에서 본받고 있으며, 종중에 전해진 문집과 간찰, 교지, 분재기 등 수천 점의 유물은 지역 의 박물관과 대학도서관에 기증하여 후학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있다. 밀양박씨 12중조의 한 분인 영동정공 휘 원광의 6世孫 좌윤 공 휘 천경 선조 까지 고려조에 벼슬을 하면서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세거하였다.7世孫도총제휘언충과아우사재감정휘 홍신 대에 조선조에 벼슬을 하면서 밀양으로 이거하였다. 밀 양으로 이거한 후 3대를 지나 1498년(연산군4) 김일손(金馹 孫)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의해화를입은사건의단초는외손김종직 의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이로 인해 김종직이 부관참시 되는 등 그 화는 외가 집안에도 미쳐 총제공의 증손 만호공 휘 경원과 아우 참군공 휘 경현이 함안 여항 두곡으로 은둔한 후로 후손들은 함안을 중심으로 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그 후 임란 의병장 무숙공 휘 진영은 충신열사의 반 열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조선 말 무숙공의 7世孫 휘 치복은 퇴계학맥의 대학자로 문중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 손들에게남기었다. 영동정공의 후손들은 문중의 역사를 계승하고자 문중의 수 많은 자료를 박물관에 기증하고, 무숙공과, 만성공의 학술대 회를개최하는등선조들의미행(美行)후세에전하기위하여 심혈(心血)을 기우리고 있다. 영동정공의 후손들은 국내외에 남녀4,000여세대이다. /자료제공박권곤영동정공파대종회간사 뱚 ▶6면에서계속 경남함안군대산면장암리집성촌전경 무숙공학술대회광경 진주경상대만성문고현판을달고있다 영동정공후예들은선조유적탐방을통해보학상식을함양하고있다. 무숙공시호교지 기락편방, 무숙공 증손 박상절 이 용 화산하 동범 제현 3 5인의 행적을기록한 책 광서실기, 무숙공 7세손 박치복 이 편찬하였다. 뱚 ■맺는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