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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5월31일 일요일 7 (제161호) 기 획 뱚▶6면에서계속 용담공의 후예는 대대로 효행과 덕행으로 이어지면서 문· 무과급제자가줄을이었다. 입향조 휘 상제의 아들 휘 문오(文五)의 호는 여와(旅窩)이 다. 학행과 효행으로 원근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고, 둘째 아들 문혁(文赫)의 호는애은(崖隱)으로 입향조의 생부휘 홍 원의 봉사손으로입적하였다.약관의나이에예기(禮記)와심 경(心經),근사록(近思錄)의심오한성현의뜻을스스로깨우 쳤다. 막내아들 주경(周敬, 文儉)은 사마시에 올라 진사로 성 품이 강직하고 간결하여 문장이 뛰어나 삼형제가 모두 학행 과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형제병효(兄弟倂孝)라 불리운 다. 여와공(휘 문오)의 장남 민제(民濟)의 손자 정현(定鉉)의 호는 유옹(由翁)으로 1849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장 령,집의 등 관직을 두루거치고 1858년 아버지 상을 당한 후에 는 치상(治喪)과 애통을 지극히 하였고, 상기를 마친 후에는 헌납, 사성,사간,수찬,교리,적상산 폭쇄관 등을 거쳤으며,1 868년에는 어머님 상을 당해 아버님 때와 같이 하였으며, 187 3년 통례로 있다가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에 올랐으며, 예조참의,승정원우부승지등을역임했다. 이때 외국의 형세는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국가는 주권을 상실하고 있어 왕의 마음을 잡고, 나라를 구제하려 누차 상소 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여 고인들에게 조금 도부끄럽지않도록처신했다. 여와공의 현손 휘 해용(海容, 의현의 子)의 호는 한남(漢 南)으로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독을 비록 여러 관 직을 거쳐 정3품 통정대부 비서원비서승 겸 장례원장례를 지 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 만휴정(晩休 亭)을 짓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더욱 은거하며 자취를 감추다 1924년 영면했다. 공(公)께서 1899년 명성황후 민씨의 신주를 봉안한 전각 경 효전(景孝殿)다례시입었던금관조복이경상남도문화재제 5호로 지정관리 되고 있으며, 1898년(고종35) 8월 10일 부정 한 관리들을 소추(訴追)하는 상소문에서도 공(公)의 강직함 과청렴함을알아볼수있어상소문을인용해본다. 【고종실록 37권,고종 35년 8월 10일 양력 3번째기사 1898년 대한 광무(光武) 2년, ‘박해용이 현안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 다’ 븮전 가주서(前假注書) 박해용(朴海容)이 올린 상소의 대략 에븯, 뷺재물이라는 것은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한정이 있습니다. 한정이 있는 재물을 가지고 한정이 없이 쓰면서 의논하는 자들은 화폐를 만들고 금광을 개발하는 것이 재물을 생기게 하는 좋은 계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화폐의 수효는 전에 비하여 10배나 되는데, 물가가 급등하여 인심은 심한 곤 경에 처하게 되고 금광을 개발하는 곳은 난리가 일어난 곳과 똑같습니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이로 말미암아 흩어지고 도적들은 이로 부터 말미암아 치성해지고 있습니다. 화폐를 만들고 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일체 혁파하고 무익한 비용을 절약한다면 백 성과나라는모두넉넉해질것입니다. 인재가 어째서 없다고 한탄하겠습니까? 시임 관료 중에는 덕망이있는사람도있고시세를아는사람도있습니다. 심지어 초야에 묻힌 실의에 찬 사람 중에도 그 적임자가 있 습니다.그러니 인재를 거두어 수용(需用)한다면인재가이르 게될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령(守令)들이 탐오하는 것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김매고 가을걷이하기 전에 월급을 다 받았으며 더구나 올해에 흉년이 들었는데도 부역(賦役)을 받아내고 세 금을 독촉하는 것이 성화(星火)보다 급합니다. 그러면서 그 세금을즉시상납(上納)하지않고중간에서이자놀이를하는 자들도 흔히 있어 왔습니다. 그달 납부해야 하는데 납부하지 않은수령들을상고하여별도로형률을시행하소서. 그리고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말하면, 해가 지나도록 지방 에있는데무슨하는일이있습니까? 속히 소환하게 하여 민정(民情)을 안정되게 해 주소서. 현 능(賢能)한사람이란특별한사람들을말하는것이아닙니다. 반드시 문학을 알고 마음이 공정하며 일을 알고 염치를 숭상 하는 사람에게 정부(政府)를 맡긴다면 재용(財用)이 넉넉해 지고 인재가 이르게 되며 수령을 선택할 수 있어 원수를 갚고 원한을씻는날을머지않아기대할수있을것입니다.뷻】 여와공(휘 문오)의 차남 민한(民翰)의 호는 망현재(望賢 齋)로옛날효자들의선행을뽑아한권의책으로만든후거우 록(居憂錄)이라하고조석으로그내용을읽었다. 1810년 과거에 급제하하자 조정에서는 인재를 얻었다고 축 하를 하였고,낭관(郎官)자계를 거쳐 승문원 부정자 정자,직 장, 저작, 박사 등을 거치었고, 1819년 통훈대부 승차하여 전 적병조좌랑이되었다. 지평에 이어 1824년 또 부름을 받았으나 어머님의병환으로 상소하여관직을사양하고고향으로돌아왔다. 1827년 어머니 상을 당해 예를 다하고,1829년 선전관, 1831 년사헌부장령,1832년 강녕현감으로선정을베풀었다. 애 은 공 휘 문 혁 의 장 남 민 정 ( 民 定 )의 손 자 계 현 (啓 鉉 )의 호 는 지우(止宇)로 1883년 문과급제후 지평, 정언, 1907년 홍문 관 시강으로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이보다 앞서 1900년 외 세의 배척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을사조약 이후 벼슬을 버리고산청실매산(實梅山)으로은거했다. 애은공(厓隱公, 입향조 휘 상제의 차남)의 넷째아들 민겸 (民謙)의 호는 수월당(水月堂)으로 그의 아들 규찬(奎燦)의 호는 우담(愚潭) 1865년 문과 급제후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 언, 병조좌랑을 거쳐 도당(都堂)에 뽑혀 홍문관 부수찬, 1878 년사헌부지평에제수되었다가그해11월문학(文學)을겸하 였고, 1879년에는 교리, 장령, 부교리, 정언, 1882년 정월에는 태천현감에 임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인현감으로 임 명되었다. 에 앞서 공(公)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과 가까운 고 을로 가기를 간청하였다. 현감 재임시 너그러운 정치를 하였 으나 정(精)하게 하였고,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나 자상하였 으므로 순찰사 윤자승은 효성이 충성으로 바뀌었다고 하면서 포상하였다. 8 8 3 년 어 머 니 의 병 간 호 를 위 해 사 직 하 고 고 향 으 로 돌 아 와 1885년 상기를 마치고 교리로 임명되어 각전(各殿)의 연상 시(延祥詩, 문관이 정월 초하루에 임금에게 지어 바치는 시) 를 제진(製進,시문을 임금의 명에 따라 지어 올림)하자 홍문 관 제학 민응식이 그 시(詩)두수를 뽑아 고종에게 아뢰자 고 종은 공을 가상하게 생각하여 자계(資階)를 올려주고 통례 원 우통례를 제수하였으며, 1886년 정월에는 통정대부 형조 참의로 승진되고,이해 5월에는 동부승지,그 후 얼마 안 되어 원 통 한 일 이 있 어 낙 향 하 여 벼 슬 에 뜻 을 두 지 않 고 있 었 으 나 , 1891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고 1893년 병조참지로 임 명되었다가 얼마후 참의로 발령되었다가 다시 참지로 임명되 었다. 이때 동비(同匪)들이 속리산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 은대궐앞에모이어그들의괴수최복술의신설(伸雪)간청하 는 상소를 올리자 공이 이들의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 다. 그러나 1894년 갑오년에 동비(同匪)가 창궐할 때 공은 그들 을 피해 삼가의 신지로 들어간 후 그곳에서 영원히 은둔할 뜻 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자년(1900) 12월에는 문상을 하기 위 해 한성으로 들어가자 당질인 정언(正言) 계현(啓鉉)이 서신 을 보 내 출 처 를 물 으 므 로 공 은 ‘ 치 세 (治 世 )에 나 가 고 난 세 (亂 世)에 물러서는 것과 치세와 난세에 모두 나가는 것이 한가지 의 도리’로 이것은 ‘성현이 모두 임금님을 잊지 않는 것이다.’ 라고답서를보냈다. 그리고 1901년 한성에서 작고 해 아들 인현(寅鉉)이 고향으 로 모 셨 다 . 이상과 같이 단계마을의 입향조 휘 상제(尙悌)의 후손들은 구한말 국권을 상실하고 외세의 부당한 농간에 맞서는 등 구 국의 일념으로 일관하였음을 알 수 있어 효(孝)와 충(忠), 그 리고절(節)을실천한명문가로지금의후예들은선조의유덕 을 기리며 숭조하는 마음으로 애종하며 종중을 이끌어 가고 있어더욱빛이난다.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597번지의 용담정사는용담 박이장선생을기리기위해건립되었다. 용담은 조선 중기 고령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관직은 대사헌, 도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낙향 후 후학양성에 여생을 바 쳤다. 또한 그가 저술한 용담선생문집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을정도로문학적가치가높다. 선생은동강김우옹선생이모셔진성주의청천서원에역시 모셔졌다. 그 후 자손들이 단계리로 이주해 와서 부조묘를 받 들고 정사를 지어 이름을 용담이라 하였다. 용담은 선생이 살 던고령마을의지명이었다고한다. 일곽은 대지가 옆으로 긴 까닭에 대문과 용담정사,사당,사 당협문이옆으로병렬로배치되어있다. 용담정사는제사를모시기위한재실로정면 5칸측면한칸 반의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다.중앙 2칸은 대청으로 좌우에는 온돌방으로구성하였다. 전면에는위로갈수록가늘어지는민홀림의 원기둥을사용 하였고, 기둥 상부에는 단순하게 대들보를 지지하는 보아지 만을 둔 민도리집 형식이다. 사당 역시 단청을 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나맞배집으로꾸몄다. 사당의대문은흔히솟을삼문으로꾸미나여기서는한칸의 협문으로소박하게자리하였다. 1920년대 중반의 단순하고 소박한 구조형식과 병렬배치, 적절한 크기의 창호 등 근대적인 건축기법이 잘 반영되어 있 다. 산청군 신등면 신차로 546-8 이 고가는 1700년 초 고령에서 이곳 단계에 이거한 휘 상제(尙悌) 公이 살았던 집으로 윗집 과아래집으로나누어져있다. 두 집은 하나의 주택 안에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를 ‘ ’ 모 양으로 배치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불수 있는 안 채와사랑채를병렬형식으로배치한것과차이가있다. 사랑채는일반적인사대부집안의사랑채보다그규모가작 으며권위적상징성을찾아보기어렵다. 문간채는 문간 1칸을 포함하여 5칸 규모를 갖는 비교적 큰 건물이다. 그 공간들은 창고, 방, 중문, 헛간으로 이루어졌다. 문간채 가 주로 헛간과 방앗간 등의 작업공간과 직접 연결되는 것은 조선후기부농주거의특색이다. 또 문간에서 안채가 직접 들여다보이는 것도 내외 관념에 구속되지않는부농계층의모습을보여주고있다. 안채는정면6칸,측면1칸으로비교적큰편이다.순수한생 활공간으로 2단의 층을 둔 받침 위에 세워졌다는 점, 건물 높 이나 구조가 다른 건물보도 크다는 점 등은 살림채를 중시하 는부농주거의또다른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 후기 부농 주거의 특징을 잘 간직하 고 있는 건물이다.고가 문화재자료 제119호와 연결되는 대문 에해주정씨정려가걸려있다. 신등면 단계리에 있는 이 고택에 가장 오래된 안채는 1918 년 세워진 것이며, 그 외 건물은 1940년 무렵에 세워진 것이 다. 건물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대문채, 곳간채가 ‘□’자 형으로배치되어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모임지붕 건물이 다. 1칸 크기의 대청 좌우에 각기 1칸, 2칸 크기의 방을 두었다. 마루의 북면은 틔우지 않고 도장방을 만들어 수장 공간으로 활용하게 꾸몄다. 잡석으로 낮게 기단을 만들고 자연석 주춧 돌위에네모기둥을세운민도리집니다. 사랑채는정면3칸,측면2칸규모의동향건물로1칸크기의 마루는넓게조성하고2개의방앞에는툇마루를두었다.안마 당에 있는 곳간채는 가운데 기둥과 토벽이 지붕을 지지하게 만들어졌다. 이 고택은 전통 민가와 상류층 주택 요소가 섞여 있으며,경 남 서부지방의 중류 농가의 전통적인 살림집 모습을 잘 유지 하고있다. 신등면 신차로542 박인현 고택은 순천박씨 인현(寅鉉) 공 (公)이 세운부농주택으로서인접한단계리박씨고가(문화재 자료제119호)와거의같은시기에지어졌다. 정방형에 가까운 평탄한 대지에 사랑채와 대문채는 멸실되 고안채,아래채,곳간만남아오늘에이르고있다. 안채는 정면 7칸의 장대한 규모로 맞배지붕의 중앙부를 높 여 변화감을 주었으며, 고급스러운 다듬돌 초석 위에 둥근기 둥과네모기둥을섞어세웠다. 전체적으로 치목과 결구가 정밀하고 부재가 튼실하며 개방 적인배치형태를보이고있다. 아래채는 안 사랑채라고도 하며 전퇴를 넓게 잡아 안채의 보조용도로사용된건물이다. 곳간채는 안채 죄측 뒷마당의 화방벽(火防壁)을 두른 토석 혼축 구조로서 두 칸으로 나누어 용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 록한실용성을보인다. 박인현 고택은 역사적·학술적 보존가치가 있는 근대기의 문화유산으로써 남부지방 부농주택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 다. /박순제명예기자(경남산청군지부) 뱚용담공의후예와유적 금관조복 -한남공휘해용이 1899년명성황후민씨의신주를봉안한 전 각 경효전(景孝殿) 다례 시 입었던 금관조복으로 경상남도 문화재 제5호 로 지정관리되고있다. 금관조복은국가의대사나경사등공식적인행사 가있을때문무백관관이 착용하는복장일체를이르는말로 흔히조복 이라한다. 이 금관조복은갑옥혁이듬해인1895년3월에서양식으로 관 복이 바뀔 때까지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공식예복으로 사용되었다. 박 해용이 승지로 재직할때입었던것으로 금관조복 일체가잘보존되어있 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 제사의례 때 입었던 제복과 관료들이 평상시에 입던관복 등선생이 사용하던유물들이 다수보관되어있다. (사진제공=박해용) 뱚단계리유적 뱚용담정사(龍潭精舍) 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558호 뱚산청단계박씨고가(古家) 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4호 산청단계박씨고가(古家).경상남도민속문화재제4호 해주정씨정려 뱚산청단계리박씨고가(古家) 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119호 고가 제4호(상단)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 전경. 고가 119호에는 박해용의 금관조복이 보관되어 있으며, 경내에 수백년의 수령으로 전해 진향나무가세월을대변해주고있다. 용담정사,왼쪽이부조묘이다. 뱚단계박인현고택 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444호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