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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4월30일 목요일 7 (제160호) 특 집 신재공(휘 겸)의 삼남 상신(尙信)의 자는 군실(君實),호는 수촌(睡村)으로학당리신장동에서 태어났다.할아버지 휘종 원이 인조 때 군량을 보급한 공으로 은전을 입어 군수를 제수 받고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어린 시절 신독재(愼獨 齋) 김집(金集, 1574-1656)의 문인 윤문거(尹文擧)에게 배웠 다. 문학이 날로 성취되고 도량이 비범하여 아버지께서 서울 에 집을 장만하고 살게 되었는데 스스로 멀리 슬하를 떠나기 를 싫 어 한 까 닭 에 십 수 년 을 왕 래 하였다. 1675년에 모친상과 1679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다한 뒤에 임술년(1 682)에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니 사우 간에 명성이 높았다. 1689년 벼슬에 뜻을 버리고 1691년 가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편안하게은거하였다.1721년 늦은 나이에 통정대부 절충장군용양위 부호군에 올랐다가 향년 86세로 천수를 다한 후세상을떴다.공은아버지휘겸의유지를받들어자식과조 카들을 가르침에 항상 정도로써 하였다. 또한 평소 종중과 향 중 의 사 람 을 공 경 하 고 돈 독 케 할 뿐 아 니 라 시 시 비 비 를 분 명 히 가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무인년(1698) 후에는 조정에 사육신의 후손과 외손을 등용하니, 이조판서 송상기에게 사람들이 공을 추천했지만 굳이 사양했다. 또 향 중 추천으로 재상의 물망에 오른 것이 4~5차례였으나 성사되 는 못했다. 만년에는 노성·연산 고을 사림의 좌장으로 추대를 받아 향중의 각종 대소사를 주도하고 좋지 못한 일을 중재하 여 분열되지 않도록 했고,노성·연산에 스승 윤문거의 사우를 세우는일에사림의의론을결집하여성취시키기도했다. 공의 6대손 지영(趾永)은 유학자로 자는 사림(士林), 호는 지헌(芝軒)으로산수와시문을즐기었다.지극한정성으로부 모에게 효도랄 다했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고 화목했 다.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그 폭과 깊이를 더하니 온 고 을사람들의존경받는스승이되었다.그리하여사사받으려는 유생들이 노성·연산·공주·부여 등에서 줄을 이었으며, 그 문 하에 무려 90여명의 문인을 두었다. 公은 매죽헌 성삼문과 암 천 박증의 절의와 사상을 이어받은 당시로서는 흔치않은 선 비였다.때문에 고향을 떠나지 않고 평소 ‘암천처사조대’를 왕 래하며 그 유훈을 가슴에 새겼다.공이 두 사람을 얼마나 경모 했는지는 그가 남긴 시문 곳곳에 배어 있는데,특히 암천의 외 가인 홍주 노은동을 방문했을 때 읊은 ‘노은동감회’, 나 ‘노은 일기’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1874년(고종11) ‘성 삼문 사관봉안 당호기’와 ‘총관성공 증첩봉장기’를 손수 써서 당호재에 걸기도 했다. 세상을 뜬 뒤에는 제자들이 동문계를 조직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공경히 받들었으며, 공이 남긴 시 문은 1911년 ‘지헌유고’란 이름으로간행되기도했다. 암천공(휘 증)의 차남 대붕(大鵬)의 자는 백도(伯圖)이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산림에 뜻을 두고 벼슬을 멀리한 채 끝까지 공명을 멀리했다. 공이 남긴 풍도는 세상 사람의 귀감 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나 가승이 실전되어 생년과 졸년 조 차 증 거 할 만 한 문 헌 이 없 다 . 사 후 에 가 선 대 부 의 빈도사에 증직되어도사공문중의중흥조가된다. 도사공 휘 대붕의 아들 유(裕)는 봉사(奉事), 손자 응록(應 祿)은 지극한 효행과 문행으로 병조참의에 추증되고,증손 휘 형( )의 자(字)는 명숙(明叔)으로 타고난 성품이 맑고 깨끗 해서 효제(孝悌)로써 처신의 도리를 삼았다.일찍이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어린 두 동생을 기르는데 지극히 우애하였고, 할 머니가 별세했을 때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주로서 빈소를 지키며 예절을 다했다. 평소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지만 영달 을 멀리하여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 광해군때 일가분이 중요 한 관직에 있으면서 벼슬을 권유했지만 끝내 사양했다. 당시 고을에 사는 역적의 사람됨을 알고 왕래를 끊었는데 얼마 지 나지 않아서 과연 그 역적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게 되니 사람 들이 그의 선견지명을 칭찬했다. 사후에 영국원종공(寧國原 從功)으로사복시첨정에추증되었다. [註- 영국공신(寧國功臣) : 1644년(인조22)에발발한심기원(沈器遠)의 역모(逆謀)사건을사전적발하는데공을세운이들에게내려진훈호(勳號) 이다. 심기원(?-1644)은 仁祖反正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臣 1등에 책록 되 었고, 이어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 재직하면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도기여하였으며,정묘호란과병자호란당시에는유도대장(留都大將) 으로한양을잘방어하였고1643년에는성절사(聖節使)로淸에다녀오기도 하였다.그러나좌의정겸남한산성수어사(南漢山城守禦使)로재직할당시 인1644년에이일원(李一元)등과함께회은군이덕인(懷恩君李德仁)을추 대하려고 모의하였다가 황헌(黃 )과이원로(李元老)등의밀고로거사직 전에체포·처형되었다. 이역모사건이사전에진압된후관련유공자들을 영국공신(寧國功臣)에책봉하였다.] 도사공의 현손 휘 중구(重龜)는 학행을 이름난 휘 홍수(鴻 邃)의 장남으로 유년시절부터학문을좋아하여재예(才藝)가 남달랐으며,사우(師友)의신망이두터웠다.사육신의후손과 외손을 녹용(錄用)하라는 조정의 명령에 의해 교리(敎理) 조 태채가 장계를 올려 1697년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후 한성참 군을 거쳐 의금부도사로 승진하였고, 익위사익찬을 역임한 뒤에 1706년 당진 현감을 제수 받았다. 공의 동생 현구(玄龜) 는 천 성 이 어 질 고 자 품 이 영 특 하 여 어 릴 때 부 터 품 행 이 남 달 랐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가 필요한 재원은 언제든지 비 치를 해두었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지 않고 부모를 생각하 니 사 람 들 이 그 의 효 심 을 살 펴 서 집 까 지 음 식 을 가 져 다 주 었 다.또 조부가 병석에 눕자 식음을 전폐한 채 조석으로 극진하 게 봉양하였으며, 1681년 조부 상을 당했을 때에는 집상(執 喪)에 예를 다하느라 효질(孝疾)로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기 도 했다. 형제간에도 우애가 돈독하여 한 방에서 기거했으며, 재산을 나눌 때는 많은 것을 가양하고 적은 것을 취했다.동기 간에는 화목을 다했으며, 이웃과 향당에서 벗을 사귐에 있어 서는 항상 신의로서 대했다. 그리하여 옥구현감 조상구가 향 중에서 보기 드문 선비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또 조 현감 이 조정에 들어갈 때 성삼문의 외손으로서 추천을 하려 하였 으나어머니의뜻에따라연로한형을주선해주도록했다. 암천공의 동생 휘 호(壕)의 자는 중심(仲深), 시호는 정간 (貞簡)으로 정간공 문중의 중흥조이다. 1501년(연산7) 36세 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계유년에 사복시 첨정으로 질정관 (質正官)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이때 서장관이 명나라에 가면 여러 가지 보물을 국법을 어기고 몰래 사서 본 국에다가 파는 관행이 있어 명나라에서 능멸을 당하는 사례 가 있었다. 이는 국가의 위신과 커다란 관련이 있으므로 나라 에서 사신을 엄선하여 公을 뽑아 파견한 것이다.1514년(중종 9)에사의장예원간원에봉직하다가이직한뒤왕명을받들어 삼공(三公, 삼정승)이 公을 비롯하여 모재 김안국, 묵재 홍언 필, 충암 김정, 양곡 소세양을 왕사의 자격으로 천거했다. 이 에 옥당에 들어가 수찬교리, 검상사인에 등용되었으나 반역 인의 외손이라고 모함하는 사람이 있어 조정의 의론이 분분 하였다.이에 김 구(金絿),정언 이약빙이 성삼문의 절의와 그 외손을 벌주는 것이 부당함을 장계, 상감이 윤허해서 사헌부 집의를 제수했다. 이후 의정부 좌참찬까지 올랐다가 급기야 세상을 뜨니 상감이 별도로 부조하였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내렸다. 정간공은아들대유(大有,장사랑)를두었으나후사를잇지 못해 암천공의 삼남 휘 대덕(大德)을 양자로 삼아 세계를 이 었는데 휘 대덕은 창신교위로 통훈대부 숙천도호부사 겸 병 마절제사를 역임했으며, 아들 빈(彬)은 승사랑 예빈시 참봉, 손자 중묵(重 默 )은 문용(文勇)이 뛰어나 누차 문과에 응시했 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 충무위 부사과에 올랐으나 수를 다하지 못하고 조졸하여 많은 사람 들이애석해했다. 이밖에도 많은 후손들이 현달하였으나 다 기록하지 못하여 아쉽다.그러나지금까지살펴보았듯후손들은매죽헌성삼문 의절의정신과암천공의충효의맥을잇고있음을알수있다. 논산시 상월면을 세거지로 하는 무안박씨 노성파 후손들의 노성 입향조는 암천공이다. 암천공의 아버지 휘 임경은 숙천 도호부사와 황주목사를지냈다.세조 병자년(1641)장인인 매 죽헌 성삼문이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을 복위하려다 참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통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부인 창녕성씨와의 사이의 장남인 암천공은 외 조부 성삼문의 일로 혼탁한 세상에 뜻을 접고 충청도 계룡산 아래(현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 바우내)로 은거하게 된다. 암 천공이 바우내로 입향 한 시기는 그의 나이 32세 되던 1492년 (성종5)이다.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던 암천은 아버 지를 여의고 홀로된 어머니조차 병고 끝에 세상을 뜨자 장차 은거할 결심을 굳힌다.그리하여 3년상을 마친 뒤에 이복형과 아우에게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 인생은 자기 뜻에 맞은것이귀한것입니다.”라고말한뒤에홀연히몸을감추었 다. 바우내에 은거한 암천은 조석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갈 매기와 벗하며 세월을 낚았다. 당시 암천이 낚시질을 하던 장 소는 바우내 서쪽 당점산 끝자락의 깎아지를 듯한 바위이다. 속칭 조대암(釣臺巖)으로 불리는 이 바위는 그 위가 넓고 평 평하여 10여명은 족히 앉아 고담준론을 즐길만한 곳으로 현 재논산시향토유적제45호로지정되었다. 암천공께서바우내로은거한것은대의를위해죽음을택한 외조부 성삼문 절의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20년은 암천공이 바우내로 입향 한지 528년 된다. 입 향이후후손들은학당리(바우내)를근거지로하여참봉공휘 대성의 후예들은 최초 입촌지 인 학당리에, 도사공 휘 대붕의 후예는 대명리에 효자공(휘 상문)의 후손들은 지경리에 세거 하는 등 논산시 상월면에서 각각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특히 청년들의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입향조 암천공의 충효정신과 매죽헌 성삼문 선생의 절의 정신의 계승발전 등 위선사업이활발하게전개되고있다. △암천처사조대와조대기 조대암(釣臺巖)은 암천공(휘 증)께서 혼탁한 세상에 뜻을 접고 충청도 계룡산 아래(현 논산시 상 월면 학당리 바우내)로 은거한 후 낚시질 하던 곳이다.암천공 사후 2 00여년이 흐른 1726년(영조 2) 윤 선거의 증손되는 윤동수(尹東洙, 1 674~1739)는 암천의 사적이 없어 질 것을 염려하여 조대암의 석벽에 ‘암천처사가 낚시하던 곳(巖川處 士釣臺)’이란 여섯 글자를 새긴다. 또 판서 유최기와 윤증의 손자 윤동원은 1740년(영조16)에 암 천의 절의를 기리는 조대기(釣臺記)를 지었다. 암천처사조대 는논산시향토유적제45호지정관리되고있다. △암천사 암천사는암천박증선생을주벽으로모신무안박씨재실이 다. 1992년 건립된 암천사는 박증 선생을 주벽으로 하여 이하 10세 22位와 동재의 추원재 39位, 서재 경모재에 배향된 38位 등99위의선조제향을음력10월5일봉행한다. △모곡서원과당호재 모곡서원(茅谷書院)은 암천 박증 선생이 타계한지 290여년 이지난1805년(순조5)에건립된서원이다. 설립초기에는 그 후손과 유생들이 암천의 절의를 추모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다가 1909년(순조9) 성균관 생원 나옹(懶翁)이필태(李必泰)를 추배하였다.1861년(철종 12) 1월 사림에서 매죽헌 성삼문을 합향 하자는 논의가 제기 되어 그를 주벽으로 배향하였다. 그리고 서원이 훼철된 이후 인 1871년(고종 8) 성삼문의 신 주(神主)를 모곡 서 원 강 당 으 로 사용되었던 당호 재 에 봉 안 하 고 무안박씨 문중에 서 외손봉사하였 다. 모곡서원의 모 태 가 된 것 은 암 천 의 은 거 지 인 논 산 시 상 월 면 학당리 바우내에 건립된 별청(別 請)이다. 후손 박 형(朴珩)이 지은 ‘ 건 사 사 적 기 ( 建 祠事蹟記)’에 의 하면 “영조 갑오 년(1774)에 지역 의 원로들이 동 문을 하니 다들 좋다고 호응하여 암천의 조대 옆 1 00보 거리에 別 請을 설치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에는 암천 선생이 초야에 묻혀 낚시질 하던 조대 부근에 사우의 기능을 띤 별청을 마련하여 향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진사 남건로가 쓴 ‘모곡사창 건기’에 “갑오년1774)에 계속해서 사람의 논의가 있으므로 바우내(암천)에 별청을 건립하고 전지(田地)를 마련했다”는 기록에서도뒷받침된다. 그러나 모곡별청은 1789년(정조13) 창건 15년 만에 바우내 에서동쪽으로조금떨어진계룡산자락의대명리모곡(띠올) 으로 이건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05년 비로소 모곡 서원의 창건으로 이어지고, 이후 60여 년 간 지 속 되 다 가 대 원 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없어졌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모곡 서원이 위치했던 곳을 ‘별청’ 또는 ‘별청산’이라 부르고 있어 지명으로나마 그 존재를 전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모곡 사 또는 모곡서원이란 이름은 ‘띠울’의 한자식 지명인 모곡에 서취한것임을짐작할수있다. 철폐되는 비운을 맞은 모곡서원은 이후 강당으로 상용되던 건물은 바우내 당점산 아래로 이건하여 당호재(塘湖齋)라 하 고 암천의 재실로 사용했다. 또한 1871년(고종8) 매죽헌 성삼 문이 배향된 홍주의 노은서원이 훼철됨에 따라 성삼문의 신 주를모실곳이없어지자외후손박진하(朴鎭廈)가예조의승 인을 얻어 당호재에 봉안하였다. 이에 3년 뒤 지헌 박지영(朴 祉永)이 ‘매죽헌 신주봉안 당호기’를 써서 강당에 현판을 걸 었다. 한편 1902년 칙명에 의해 성삼문 봉사손이 결정되어 그 신주를연기군금남면달전리봉사손댁으로환안하였다. 당호재에는 별청과 모곡서원관련된 각종 편액과 고문서가 보관되어 있으며, 성삼문의 신주를 모셨던 요여는 충남 문화 재자료제20호지정관리되고충남역사박물관에기탁되었다. △청풍정(淸楓亭) 청풍정은암천공이노닐던곳을기념하기위해조대부근에 1950년 3월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퇴락되어 철거되었 으나 지난 2017년 암천사 입구에 복원되었다. 뱚 ▶6면에서계속 뱚집성촌 뱚유적(遺蹟) 당호재 요여-충남문화재자료 제20호 암천선생이 외조부인성삼문선생이 단종복위사 건으로 화를 당하자 선생을 존숭하면서 아버지의 유훈에따라외손봉사를지켰다. 1871년(고종8) 홍주노은서원이 훼철됨에따라성 삼문의신주를모실곳이 없게되자외손박진하가 예조의승인을얻어노성당호재에봉안하였다. 현 재는충남역사박물관에기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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