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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재홍선생 생가
1926년 12월 27일 조선일보사에 편지가 날아들었다. "본인은 2천만 민족의 생존권을 위해 왜적(倭敵)의 관‧사설 기관을 심판하려 합니다." 의열단원 나석주가 보낸 것이었다. 이튿날 나석주는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져 일본 경찰 7명을 죽이고 자결했다.
조선일보는 네 차례 호외를 내며 이 사건을 보도했다. 총독부는 안재홍 조선일보 주필을 체포 대상 1호로 떠올렸다. 종로경찰서장 모리(森)는 "안재홍이 있는 이상 서장 노릇도 못해먹겠다"고 했다. 민세 안재홍은 일제 36년 아홉 차례. 7년 3개월 감옥살이를 했다. 민세는 신간회와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민족지사이자, 고대사 연구와 문자 보급에 앞장선 우람한 학자였다. 조선일보 주필‧사장으로 1500여편의 사설·시론을 써낸 당대 오피니언 리더였다. 이처럼 여러 분야 앞줄에 있었으면서 끝까지 일제에 머리 숙이지 않은 인물은 달리 찾기 힘들다. 해방이 되자 중앙방송 아나운서는 '산천초목도 춤추는 독립이 되었습니다"라며 들뜬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민세는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동으로 해방된 것이니 전 국민이 자중할 것을 호소했다. 민세(民世)라는 아호는 '민중의 세상' '민족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민족으로' 라는 뜻을 담고 있다. 좌우익 싸움 한가운데서 민세는 계급 간 불평등은 없어져야 하지만 그보다 앞세워야 할 게 계급을 넘어선 민족 단결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정치적 입장을 ‘순정우익(純正右翼)’이라고 했다.
동서고금에 해박하고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곁들인 민세의 대문장을 사람들은 민세체라고 불렀다. 그는 "내가 이기고 내 파가 이기고 권력과 향락이 나의 부대(部隊)에 있다고 즐거워할 때 민족과 조국은 어느덧 남의 밑에 붙어 버렸던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자"고 호소했다. 그로부터 2년도 못 돼 6‧25가 터져 민세는 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안채는 약 100년된 초가집이며, 사랑채는 일제말기에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며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를 교열·간행한 조선학 운동의 산실이다. 민세가 사용했던 우물, 아끼던 향나무. 능소화 등 관련 흔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