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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첨 배절을 받았으나 의지를 불굴하고 서계 박세당 찬갈하다. 제의 휘 홍국 호 사촌관은 울산판관이오. 국조 실록을 편수하고 불기불구는 공의 안신입명지지도를 근본으로 삼았다. 증 이조참판 황해도 도사 우암 송시열 찬갈하다. 20세 휘 석하는 공의 고요. 생 3남하니 장왈 덕순 차왈 여순 계는 즉공야. 1880년 3월 1일에 양주군 남면 구암리에서 출생하고 배는 안동권씨다. 공은 유문명하고 용력이 과인하여 불의불인하더니 을미지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여 2천만 민족이 통분을 금치 못할 때 공은 의연이 칼을 잡고 일어나 의병을 소모할제 격문 효유문 고시문을 반포하여 창의 원사 부우장군이 되어 좌장군 정용대와 이은찬 연기우 강기동 제장과 연합으로 3백 여 의병을 규합하여 양주 파주 영평 연천 삭녕 백천 김천 연안에서 왜구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년간 의병 활동 중 1909년 2월 양주군 광적면 석우리 전투에서 일제에 간담을 서늘케하고 왜구의 첩자 권덕수를 타살하고 혁혁한 공적이 지대했으나 1909년 3월 17일 파주군 적성면 적암리에서 왜구와 교전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시니 29에 청춘으로 산화하시다. 공의 위국단성이여 빛나도다. 공은 혈육이 없고 사료가 없어 무주고혼이 된 지 70여 성상이 경과한 1978년도 의암 정용대 장군 유고에서 공의 투쟁사가 고증이 되고 독립운동사에서 확증을 얻었으며 분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