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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지역 주요전투상황. 1950년 6.25한국전쟁 발발 당시 부평지역은 7월 3일 적의 한강도하로 적군에 점령되고 말았다. 부평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서울로 진격하든 과정에서 였다. 1950년 9월 16일 연합군 맥아더장군의 특별 명령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해병대사령부의 최우선 과제는 김포 비행장의 조기 탈환이었다. 한국군은 미 제5해병연대에 배속되어 해병 제3대대 제9중대, 제10중대, 제 11중대가 참전하였으며 미 해병대는 제5해병연대 제1대대, 제2대대, 제3대대와 미 제1해병연대 제1대대, 제2대대, 제3대대였다. 한국군 해병대는 국토를 다시 찾는다는 호국충정의 일념으로 사기가 충천하였다고 공격의 외선봉에서 선발 공격대 역할을 감당하였다. 9월 16일 인천에 상륙한 후 간석동까지 빠르게 진격하였고 9월 17일 새벽 4시 한국군 해병대 제3대대가 도화동 숙영지에서 도보 행군을 하며 석바위를 지나 오전 6시경 원통이 고개 일부 부근에 도착하였다. 이떄 주요 공격의 축은 경인국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 좌는 부평역과 우는 원통이 고개를 넘어 마분리(현 부개동) 일대 그리고 현재 인천가족공원인 부개산 일대와 만월산을 따라 부천 성주산으로 이어지는 공격로 등이었다. 부평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로는 T-34소련제 탱크 6대를 앞세운 북한군 200여명이 경인국도를 따라 원통ㅇ 고개(현 동수역에서 호명사 고개를 넘어 부평삼거리역 앞길)로 향하던 중 오전 8시에 이를 서전에 포착한 미 제5해병대 제1대대와 제2대대 그리고 뒤이어 합류한 한국군 해병대 제10중대가 극렬하게 저항하는 적을 고개입구 길(현 신명요양원 앞길일대)에서 모두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침투 직후에 맥아더 장군이 원통이 고개 입구까지 도착하여 현장을 시찰하고 격려하였다. 이를 기세로 미 제5해병대연대는 원통이 고개 야산(구 부개산 헬기장)으로 진격하여 제1개 중대규모와 교전하여 적의 주저진선인 208고지(현 부개산 인천가족공원) 복쪽 봉우리를 정오에 확보하였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적들과 하루 종일 치열하게 시간전까지 벌이며 마분리일대(현 부개동 지역)을 완전하게 확보함으로서 김포비행장 탈환과 서울 수복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또한 부평역 철길을 따라 진격하던 한국해병대 제11중대와 제9중대는 부평역앞 적 37고지 포도밭 언덕(현 텔슨전자 건물자리)에 은거하고 있는 적들과 교전하였으나 언덕 지형으로 저항이 완강하여 뚫지 못하였고, 더욱이 조병창에 위치한 저46고지에서 적의 자동화기가 공격으로 협공을 당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던 중 한국군 후방지원 미 제5해병대 G중대가 137고지(현 선포산)에서 화력지원으로 조병창에 있는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한국 해병대와 함께 공격에 가담하자 적은 그대로 도주하였고 한국군 해병대 제3대대는 부평일대 주택가로 숨어든 적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부평지역은 시가의 중심지역에서 그대로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전우들이 뜨거운 피를 쏟아 부은 피의 전적지이며 구적을 초월한 호국의 현장인 것이다. 우리 후손들은 6.25한국전쟁의 역사가 기억 가운대에서 사라지면서 점차 전쟁의 역사가 기억 가운데에서 사라지면서 점차 잊혀지고 있는 호국의 영렬들을 추모하고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기원드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