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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으며, 초대 제8군 사령관인 윌턴 워커 중장이 사고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군 장성의 아들 중 140명 이상이 전쟁에 참전하여 그 중 30명 이상이 전사했다. 이러한 미군의 희생은 전황의 역전이라는 값진 결실로 되돌아왔다. 1950년 7월 말부터 한 달여간 계속된 낙동강방어선 전투와 9월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은 한국군과 함께 북한군 공세의 격퇴와 반격이라는 극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었다. 이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황이 다시 불투명해진 상황에서도 유엔군의 투지는 계속 이어졌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2년 가까이 지속된 지루한 공방전 속에서 한국을 지켜낸 것은 한국을 도와 전장을 지켰던 미군의 눈물과 피였다. 한·미 연합군 사령부 구호가 만들어진 것은 20여 년 후의 일이지만, 이미 6·25전쟁의 시작과 함께 국군과 미군은 운명의 길을 ‘같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6·25전쟁을 통해 형성된 한·미 양국의 인연은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도 단절되지 않았다. 양국은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조치 후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합의하였으며, 10월에는 공식적으로 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실제 발효는 의회 비준 이후인 1954년 11월 이후에 이루어졌다). 이제 한·미는 동맹이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에 의해 결속을 보장받게 되었으며, 1954년에 체결된 ‘한·미 합의의사록’에 따라 한국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계속 귀속시키는 대신 미국은 대규모 군사 및 경제원조 제공을 약속하였다. 실제로 미국은 1955년 이후 상당 규모의 군사원조를 한국 에 제공하였다. 특히 미 공법(公法) 480조(PL 480)에 의한 대충자금(counterpart fund)은 한때 한국정부 지출의 2배에 해당하는 대규모로 한국 경제 회생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후 냉전 시대와 데탕트 그리고 탈냉전시대를 거치면서도 한·미 동맹관계는 변함없이 발전되어 왔다 . 1968년부터는 한·미간 안보문제 협의를 위한 연례적 대화협의체인 ‘한·미 연례안보협의회’가 창설되었 으며, 1978년에는 ‘한·미 연합군 사령부’의 창설을 통해 양자간 군사협력의 신뢰성과 효율성이 더욱 강화되었 다. 1980년대 이후에는 과거의 “후원자-수혜자 관계”(patron-client relations)를 넘어 동반자 관계 형성을 위한 공통의 노력이 이루어져 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미 동맹관계는 조정 기간에 들어서게 되었다. 양국은 안보환경과 세대의 변화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인식과 기대치를 조 정하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한국 내의 반미 정서나 미국 내의 혐한(嫌韓) 감정이 양국 간 외교관계의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에 걸친 한·미 관계의 조정과정은 50년을 넘긴 노후한 동맹이 새로운 생명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겪어야 했던 불가피한 통과의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한·미 양국은 동맹 파트너가 지니는 전략적 가치와 공통이익 그리고 미래의 협력이 가져올 잠재적 이익을 재조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전략 동맹’(strategic alliance)의 비전과 청사진을 공유하게 된다. 한국과 미국은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로 향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우해야 하는지를 새로이 학습하였고, 많은 교훈들을 가슴속에 새기게 되었다. 6·25전쟁 발발 후 60년 시간이 지났지만 역사의 교훈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그 속에서 한·미 협력의 경험을 되새기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오랜 친구가 과거에 도와준 일을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며, 그 기억을 앞으로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차 두 현 1950년 부산 1952년 3월 경기도 파주 임진강 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