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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일본·중국·미국을 종횡무진하며 광복을 향해 뛴 “차경신” 69 항하는 어머니를 붙잡아 불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가운 데 줄임) 일제강점기 애국지 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악형 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 았지만 어머니처럼 때려서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일은 들어 보도 못한 극형이었다.” 모친 영향으로 일본 유학, 국내외 넘나들며 독립운동 모녀 독립운동가인 언니 차경신(1993, 애국장)과 어머니 박신원(1997, 건국포장)의 이야기를 소상히 기억하여 기록으로 남겨 놓은 동생 차경수가 아니었 으면 이들 모녀의 치열한 독립운동 이야기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차경신 지사는 평북 선 천이 고향으로 1892년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차기 원과 어머니 박신원 사이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이 후 삼대독자 집안에 차경신을 포함하여 내리 딸 여 섯을 낳은 박신원은 홀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버 림을 받았다. 실의에 차 있던 박신원 지사는 이 무렵 (1897) 가물남 지방을 찾아온 선교사 휘트모어의 ‘아 들딸 구별없이 남녀는 모두 평등하다’는 기독교 사 상을 전해 들었다. 당시 박신원 지사에게 기독교는 구원의 빛이었으 며,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적인 인권을 담보 해주는 것이었다. 또한 앞으로의 시대는 여성도 남 성과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교육을 받아야 장래에 희 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차경신 지사는 철저한 어머 니의 ‘여성 교육’에 대한 소신으로 16살에 보성학교 를 거쳐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어 1919년 2월에는 일본 요 코하마여자신학 교로 유학을 떠 났다. 이때 도쿄 에서 있었던 유학생들의 2 · 8독립선언을 보면서 국 제정세 변화를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겠 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 유학 와있 던 김마리아와 함께 동지가 되어 비밀리에 2 · 8독립 선언문을 가지고 입국했다. 고국의 3 · 1만세운동에 불을 당긴 차경신 지사는 평북 선천에서 신한청년당 (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이어 1919년 11월 무렵에는 대한청년단연합회(大 韓靑年團聯合會) 총무 겸 재무로 뽑혀 중국과 조선을 드나들며 독립자금을 모금하였고 12월에는 삼도여 자총회(三道女子總會)를 열어 여성들의 결속을 다졌 다. 이듬해 1920년 8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島山)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면서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1월에는 대한국 민회, 부인향촌회(婦人鄕村會)와 연계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정애경· 최윤덕 등과 여자연합단 대표로 임시 정부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차경 신 지사가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중 화민국 외교부에서 발급 받은 여권 (1923.11.6)  차경신·박신원 모녀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