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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 • 신간회의 창립과 활동 69 회는 ‘해소’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중앙 간부진을 구 성한 뒤 ‘해소안(案)’을 제출했고, 일제 경찰이 찬반 토론조차 금지하자 거수 표결로 ‘해소안’을 가결시 켰다. 민족운동을 민족 전체가 아니라 계급(주의) 관 점에서만 바라본 사회주의자들의 오판은, 1931년 5 월 현재 지회수 141개, 회원 수가 4만여 명에 이르는 조직을 대안도 없이 해체시켜 버렸다. 신간회운동의 의의와 교훈 신간회운동은 4년여의 활동으로 끝났지만, 비타 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하나로 합친 최대의 민족협동전선 조직이었다는 사실은 의의가 매우 크 다. 그러나 이념상으로 최종 지향점이 달랐던 두 운 동 세력의 결합은 지속하기 어려운 한계를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 신간회 해체는 ‘협동’하려면 이를 뒷받 침할 이념 · 이론 또 지탱할 정치세력이 전제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 해체 운동이 한창일 때,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은 우경화한 타협주의의 자 치 운동 노선과 좌경화한 사회주의자들의 계급주의 노 선을 모두 비판하면서 ‘의식적 중간세력’을 자임하 였다.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의식적 중간세력’으 로 결집한 뒤 신간회가 민족협동전선으로 발전한 사 실은, 중도 세력이 양극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합 을 선도 · 주도하였음을 보여준 선례였다. 오늘날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이지만, 선진국 의 대열에 든 대한민국이 양극화한 이념 갈등을 극 복하고, 민족통일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신간회의 통 합정신이 요구된다. 신간회는 한국근현대사에서 비 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결합과 분리를 경 험한 최초의 사례였다. 신간회운동은 긍정과 부정의 의의를 함께 지니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과 국격(國格)이 ‘세계화’라는 수준으로 진전하기 위해 서는, 중도(中道)의 가치를 확립하고 실천하는 당면 과제도 일깨운다. 신간회 안동지회 제2회 정기대회 광경(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신간회 전체대회(해소대회) 광경(1931.5.16, 『조선일보 』  1931.5.17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