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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 • 유기동 · 김만수 · 최병호 선생 69 시작했다. 무장독립운동의 발흥이 그것으로, 크고 작은 항일조직과 독립군 부대들이 동 · 남 · 북만주 각 지에 등장하고 저마다의 몫과 방식대로 활약하면서 독립전쟁의 기운을 북돋아갔다. 특히 1920년의 봉 오동전투와 청산리전쟁에서 우리 독립군이 거둔 대 승은 무장독립운동의 앞길을 훤히 틔워주는 횃불과 도 같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과 잔악한 보복(‘경신참변’) 때문에 역량 보존을 위한 독립군 조 직들의 근거지 이동이 불가피해졌다. 북방 밀산(密 山)에서의 독립군단 집결과 아무르강 건너 시베리아 방면으로의 대이동은 그 때문이었는데, 1921년 일 본군의 시베리아 철수 후 독립군단은 만주로 되돌아 가 재정착하였다. 그 후, 개별 독립군 조직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무장독립운동 전체의 역량 결집을 꾀하는 ‘군사통 일’ 노력이 먼저 시도되었다. 그 결과, 남만주에 서는 1922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거쳐 대한통의부 (統義府)가 민정까지 겸하는 중심조직으로 성립하였 다. 그런데 그 내부에서 왕조회귀의 ‘복벽’ 노선과 임 시정부 절대 옹호의 ‘민국’ 노선이 날카롭게 대립하 던 끝에 각각 대한의군부(義軍府, 1923.2)와 참의부 (參議府, 1924.6 ;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육 군주만참의부’)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통의부 잔류파 는 남만주 북부의 다른 군소단체들을 규합하여 임시 정부와는 상당 정도 거리를 두는 입장의 정의부(正義 府, 1924.11)를 새로이 발족시켰다. 북만주에서도 대 한독립군단 결성(1922.8)과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재건(1924. 3) 등의 통합 움직임을 거쳐서 1925년 3 월 영안현에서 신민부(新民府)가 건립되었다. 그렇지만 만주가 무장독립운동이 쉬운 공간은 아 니었다. 정치적 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서 · 북간도의 요처마다 도사리고 있으면서 거류 한 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끈을 조여만 오는 일본 영사관과 그 산하 경찰, 상시로 그들의 손발이 되어 1920년대 독립전쟁과 3부의 성립 (출처: 『한국사』교과서, 해넴 에듀, 2015) 1920년대 중반 참의부 독립군의 모습(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