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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고취하더니 1932년에 발생한 신사비라 살포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야학을 강제해산 할 때에는 검거된 인원만도 천을 넘었다. 일컬어 장흥야학사건이다. 1930년에는 농민운동비밀결사인 전남농민운동협의회에 가입하시어 이 지역을 거점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등 활동하시다가 1934년에 치안유지법위반 죄목으로 투옥되신 바 그 고초를 어떻게 형언하리오. 옥에서 보낸 세월이 3년 반에 이른다. 출옥 후에도 일제의 엄혹한 사찰을 받으시다가 드디어 해방을 맞으시니 일제치하 36년간을 한가지로 항일독립운동에 몸 받쳤음이요 그 빛이 산하와 겨레를 비쳤음이다. 해방을 맞으신 선생께서는 건국준비위원회와 국민회의의 장흥지역 임원직을 역임하시며 혼란스럽던 시국을 수습하시고 초대 전라남도의회 의원에 당선되시어 1952년부터 4년간 의정활동을 하신 후 956년 8월 23일 타계하시니 애석하구나. 향년 47세시었다. 선생의 한 생이 이러하거늘 나라가 어찌 모른다 하겠는가.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1994년에는 유해를 옮겨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모셨다. 이에 한 돌을 골라 갈고 씻어서 선생의 이름을 새기는 바이니 선생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마다 가슴에 불꽃이 타리라. 2006년 7월 일 시인 위선환이 글을 짓고 자손들이 터를 닦아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