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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 휘는 순곤이요 조의 휘는 중용이며 고의 휘는 근욱이요 비는 여산송씨 채묵의 녀이다. 공은 3남 중 차남으로 고종 정해 1887년 8월 24일에 태생하니 자유로 영특하시고 장성하여서는 의협의 기풍이 출중하였다. 광무 강희년간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나라없는 백성으로 노예의 신세가 되어 한국 유사 이래 국치민욕이 이같은때가 없었다. 위인걸사는 국내외에서 충담의혈로 의병을 일으키었고 선생께서는 또한 년24세의 젊은 나이로 국치민욕을 설월하고자 동지를 규합하여 조국독립을 쟁취코자 제자인 조종운을 연락책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시었고 기미 3.1운동때 해남읍 시가에서 여러동지와 함께 일본 침탈의 야만행을 규탄하면서 우리 한국은 자주국가임을 세계우방에 선포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하시다 왜경에 피체되어 가진 고문을 겪으면서 장흥법원의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고 불복 상고로 광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의 선고형으로 옥고를 치루고 출옥 후 고문 후휴증 병든 몸으로 매우 조심스러히 독립운동을 계속하디가. 광복 후 민국 28년 병술 11월 22일에 당년 29세로 졸하니 묘는 해남읍 안동리 산 13번지 자좌원에 장례하다. 배는 이천서씨 화산의 녀요 1890년에 경인 3월 8일에 나서 유부덕하시다. 1976년 병진 12월 12일에 졸하니 묘는 여공합조이다. 유 2녀하니 왈 상순과 상심이요 외손에 이노경과 이동훈이다. 아! 이선생님이시여 국치를 설원코자 동지를 규합 3.1운동에 해남대표로 동지 김동훈 지사와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일본 침탈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의를 실행하신 애국지사님이였기에 늦게나마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의 건국사업포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유공자증서를 받았다. 아!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리요. 이제 비를 세우고자하여 종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