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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제주 4.3사건의 광풍에 휘둘려 산화한 영령들, 가신 지 60여 성상에 이르러서야 님들의 이름을 빗돌에 새겨 그 정을 기리려 하니, 가슴 저미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구나.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좌우이념의 대립으로 발발한 제주 4.3사건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제주도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하원마을에서는 군경에 의해, 무장대에 의해, 60여 명이 살해되었고, 무장대의 방화로 104동의 가옥이 소실되었다. 입산한 무장대는 1명 뿐이었지만 습격은 잦았다. 4.3사건이 일어나던 1948년 11월 10일(음) 1차 습격 시, 거리왓 쌍말가래 육박전은 처절했다. 그 때 무장대 1명이 생포되어 성난 주민들에 의해 참살된 뒤 5회나 더 습격을 받았다. 습격 뒷날이면 경찰조사로 주민의 고통이 막심했다. 식량을 빼앗긴 사람은 제공자로, 밉보인 사람은 내통자로 낙인찍혀 끌려가면 돌아올 줄을 몰랐다. 군경과 무장대의 틈에 끼어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 참상을 어찌 말로 다하랴. 시대를 잘못 만나 억울하게 가신 님들, 사회의 지도자가 될 만한 자질을 타고 났다고 기뻐했는데, 그게 오히려 허무하게 가는 길이었으니 애통하기 그지없구나. 얼굴 마주 보며 오순도순 살아가던 이웃들을 원수로 만든 시대, 그 험한 세월은 흐르고 이제는 용서와 화해와 상생의 계절을 만나 막혔던 가슴을 활짝 열어 마음껏 울고 웃게 되었다. 얼마나 흐뭇한가.
하원마을은 예로부터 양반촌, 또는 문촌이라 일컬었다. 서당이 많아 이웃마을 학동들까지 찾아와,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이면 시회가 열려 원근 문사들이 모여들었다. 예절 바르고 인심 좋은 고장으로 부러움을 산 마을이다.
그 아름다운 고향땅, 정갈한 이 동산에 구천을 떠돌던 님들은 초혼하여 제향을 올리고 한을 풀었으니, 하원마을엔 세세 생생에 기쁨이 넘치고 웃음소리 끊이지 않겠구나. 생전의 말씀은 귀에 쟁쟁하고, 온화한 얼굴은 눈에 삼삼하여, 부르면 대답하고 달려올 듯 싶어라. 그 때는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던 아들 딸들이 제단 앞에 엎드리고, 얼굴 모르는 손자들이며, 정을 나누던 형제자매 이웃들까지 모두 머리 숙여 명복을 비니 천지가 감동하는도다.
아! 님들은 이제 서천 꽃밭에서 안면하겠구나. 2008년 4월 3일 은석 조명철 짓고 청운 김택춘 감수 평산 고병숙 쓰고 제주 4.3희생자 하원 유족회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