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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에 높푸른 도솔봉 정기 받고 어버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몸은 쓰러져도 나라를 놓지 않았던 맵고 곧은 한 선비가 있었으니 이 분이 곧 한 양이 선생이시다. 1883년 1월 17일 예천군 용궁면 송암리에서 태섭공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니 호는 석조요 자는 여경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준수한 기골과 활달한 기백에 충과 효의 빛나는 가통을 이어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1905년 망국의 을사조약이 강체되자 왜적은 우리의 주권을 앗아 가니 태섭공은 붓을 던지고 칼을 잡아 아들 양이와 함께 이 강년 의진의 참모로서 원수를 무찌르고 겨레를 달래다가 원통하게도 진중에서 병사하셨다. 선생은 「나라 사랑하는 내 뜻을 잊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명심하고 소백산과 낙동강 일대를 누비며 나라의 원수와 맞서 피 맺힌 싸움을 거듭하여 의병의 서슬을 떨쳤다. 그러나 이강년공 및 장 윤덕공 등을 잃은 의진은 무너지고 하늘은 끝내 이 나라를 버렸으니 처절한 겨레의 울부짖음에 산천도 설워 흐느끼고 보주 영 맑은 샘도 노여워 흐려졌으리라. 선생은 뼛속에 사무친 원한을 가눌 길 없어 이 강년공의 아들 승재님과 의형제를 맺고 1912년 결사대를 조직하여 매국노의 처단을 꾀하였으나 탄로되어 승재님은 피를 토하고 분사하였으며 선생은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1922년에는 신 태식 이 응수 김 찬규 서 상언 장 진우님 등 수십 명의 동지들과 의용단을 조직하고 길림성 군정서의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옛부터 선비는 목숨이 끊어져도 뜻은 굽히지 않는지라 출옥 후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과 감시에도 굴하지 않고 구국의 일꾼을 기르고 겨레를 일깨운 보람있어 조국 광복을 보시고 1949년 3월 16일 돌아가시니 그의 한 살이 66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