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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는 젊은 학도로서 이런 환경 속에서 묵묵히 공부만을 할 수 없어 뜻있는 동지들이 모여서 나라찾기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1939년 8월 7일 밤 왜관 학생 근로 봉사를 계기로 낙동강 백사장에서 권쾌복 배학보 김성권 문덕길 등 17명의 동지가 모여서 비밀 결사 백의단을 조직하여 1년 반 여 동안 우리 역사 우리 문화를 연구하고 문예와 운동을 통하여 독립정신을 길렀다. 이때가 선생의 3학년 때였다. 그리하여 1941년 2월 15일 밤 대구시 봉산동 242번지 이용남 씨 집에서 권쾌복 배학보 최영백 김성권 문덕길 유흥수 이주호 등 동지 17명이 모여서 선배들이 조직한 문예부 연구회를 통합한 비밀 결사 차혁당을 조직하여 명실 공히 대구 사범학교 학생 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다하였다. 이때가 선생의 4학년 말로서 말구에 5학년이 되는 때였다. 1941년 11월 대구 사범학교 차혁당 운동이 탄로가 나서 대전 감옥에 구금되고 2년 여의 예심을 거쳐 2년 6월의 징역형을 받아 복역하다가 8.15 광복으로 풀려났다. 1946년 2월에 대구 사범학교 심상과를 입학한 지 10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선생은 또 향학의 뜻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1949년 3월에 국학대학 문학부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1960년 3월에 동 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는 영광을 얻었다. 1946년 2월부터 청도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모계 중고등학교 교사와 김천 여자 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5년 4월에 풍각 농업고등학교 교감으로 승진하여 근무하다가 길안 중학교 교장 금천 중고등학교 교장 칠곡 중학교 교장자인 중고등학교 교장 봉양 중상업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시고 정년 퇴임하였다. 선생의 일생은 파란곡절도 많았으나 처음에는 독립운동으로 국가와 민족에 충성을 다하고 여생은 교육 창달에 몸바쳐 국가에 공헌하였다. 참 진실하고 고귀한 한평생이었다. 1995년 19월 9일 대구 보훈병원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