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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에 편입학하여 1925년 3월 졸업과 동시에 문예활동을 통한 대중 계몽운동에 전념하여 작가인 김기림, 한설야, 정지용, 임화, 이효석, 백기만 등과 서로 사귀면서 9인회를 조직하고 조선예술동맹에 가입하여 1928년 조선영화예술인협회가 창립됨을 계기로 첫 잠품 유랑을 제작하여 일제식민통치로 땅을 빼앗기고 유랑하는 농민의 아픔을 그렸고 연이어 7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주로 항일과 배일이 주제였다. 대표작으로 애련송은 당시 우리 영화계의 거성 나운규와 쌍벽을 이루고 있을 때 일본제국의 지식인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라 무수한 애국운동가를 붙잡아 고문, 투옥, 살육을 자행한 총독부경무국에 적발되어 검속이 되풀이 되면서 경계 인물로 감시를 받아 오던 중 1933년 5월 함흥형무소 폭동사건에 관련 협의로 잠시 일본으로 피신하여 송죽영화사 경도 촬영소에서 연출 및 분장술 등을 연구하였다. 1937년 12월 극난신건설사건으로 임화 외 20여명이 전주 경찰서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을 받아 1년 만에 석방되어 의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