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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송학선 선생 67 착성을 볼 때 오히려 외유내강하는 강직한 성품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성품 은 재판과정의 의연한 태도로 방청하는 사람 들을 감동시켰다. 송학선은 13세(1909년) 때 서대문공립보 통학교 1학년에 다니던 중,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가정이 궁색해져 가족들이 이산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전라도로 연근장 사를 떠났고, 그와 아우도 집을 떠나야만 했 다. 이때 송학선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갖 은 고생을 하였다. 20살(1916년) 때 서울 남 대문통에 있는 일본인 토다[戶田春藏方]가 경 영하는 농구회사에 고용원으로 취직하였다. 이 회사는 시골 정미소에 발동기를 판매하는 회사였다. 여기서 장사 심부름도 하고 발동 기 운전과 수선기술을 배웠다. 일본인 직장에서 받았던 민족적 차별. 안중근 의사 흠모 송학선이 반일 감정을 느낀 것은 매우 어 렸을 때부터였다고 한다. 어느 날 동무들과 진고개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하얼빈 역두 에서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 단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았다. 이때 안 중근의 의거에 대해 동무들과 얘기를 하였 고, 그를 흠모하면서 본받아야 되겠다는 생 각을 품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반일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인 농구회사에 있을 때 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정사정으로 취직 을 했지만, 그 직장이 일본인 회사였다. 이때 민족적 차별을 받았고, 병으로 강제 해고당 하면서 그러한 의식이 더욱 뚜렷해졌다. 송 학선이 조선 총독을 처단하기로 한 것은 일 본인 회사를 그만둔 이후부터로 짐작된다. 송학선 가족. 뒷줄 가운데가 송학선 송학선의 집(이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가구 거리 뒤쪽에 있는 송학선 의사 옛 집터. 두 갈래  길의 가운데 있는 5층짜리 다세대주택 자리가 송의사의 집이 있던 곳이다(서 울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