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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선 선생은, 충남 천안(天安) 사람이다. 1926년 여름에 조직된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항일학생결사 건아단(健兒團)에 참가 활동하였다. 동교 기숙사내 한국인 학생모임인 "조선인학생담화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건아단은 민족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 건설을 목적한 학생결사였다. 그들은 먼저 농촌사회의 개발이 곧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그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 지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들은 수원군 안룡면(安龍面) 고견리(古牽里)를 비롯한 부근 여러 마을에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때 단군 연호를 사용한 것이 후일에 말썽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27년 9월에 북도(北道)지방을 수학여행하게 됐을 때, 강원도 등지에서 일인의 대규모 농장을 본 건아단원들은 그 식민성 농장에 분개하고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1928년 6월에 건아단은 당시 일본 동경(東京)에 설치되어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농촌개발'이라는 조선농우연맹의 주장에 합류하여 추진키로 했다. 그것은 건아단의 이상과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조선농우연맹이 국내에서 지방강연 등 계몽활동을 할 때, 수원고농의 학생도 연사로 참석하였는데 일제에 의해 강연활동이 중지되면서 여기에 연사로 참석했던 수원고농생 한전종(韓典鍾)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이때 건아단의 조직이 발각되지는 않았으나 단원들은 사태를 중시하고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명칭을 개칭 위장하였다. 그런데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金聲遠)이 건아단의 목적을 수행하던 중 일경에 검거되는 일이 일어났다. 때문에 1928년 여름에 계림농흥사는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조직을 개편했으나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동결사의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어 1928년 9월, 전회원이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18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2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판결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자료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