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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전장이 확대되고 장기전으로 들어가자 일본군 위안소 설치범위와 수도 점차 확대되었고 '위안부'에 대한 군대의 필요도 급속하게 증가되었다. 일본의 매춘여성들로만 군위안부로 고용하는 것으로 그 수요를 충족할 수 없게 되고 강간과 성병 확산을 막을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져 일본군은 정책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모집하는 대대적인 동원을 하게 되었다. 동원방법은 취업사기에 의한 연행, 폭행이나 협박에 의한 강제연행, 인신매매, 근로정신대를 통한 동원, 공출, 봉사대, 근로대 등의 형태가 있었다. 한국 피해여성들 중 상당수가 취업사기로 연행되었는데 이는 일제강점하에서 당시 한국이 극심한 빈곤상태였고 이 가난한 가정의 어린 여성이 입을 덜기 위해,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좋은 곳(공장, 간호부 등)에 취직시켜준다는 꼬임에 따라 나섰다가 위안소로 가게 된 것이었다. 취업사기의 모집책을 보면 직업소개소, 면장, 이장, 경찰(헌병) 등 민관의 관여가 피해여성들의 증언에서 수시로 확인되는데 이는 일제와 일본군이 의도적으로 직접 관여를 숨기기 위해 모집 전면에 직업소개소를 내세우고 지역의 관이 보조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었다. 1938년 일본 육군성 병무성 병무과 기안문서에 "~위안부 모집에 있어 타당상을 결여하여 사회문제로 되고 있으므로... 이것을 실시할 때에는 관계 지방의 헌병 및 경찰당국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군의 위신 유지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 문제면에서 밖에서 새어나가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기 바란다."에서 그 교묘한 의도가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모집방법은 당시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반적으로 적용되어졌다. 동원된 여성들의 나이는 10대~20대로 평균 16~17세의 어린 소녀들이 가장 많았으며 12세의 어린 소녀도 있었다. 동원된 피해여성들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5만~수십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중 한국여성들이 가장 많았으며 이는 일제와 식민지하에 있던 한국여성들이 동원하기가 용이했고 성병방지를 위한 대상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