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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찌간에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조선왕조 27대 519년 대한제국 18년만에 막을 내리고 조선총독부에 의한 35년간의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었다. 초대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찌는 치안을 헌병경찰제도로 개편하여 자유를 박탈하고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려하니, 우리의 선조들은 은밀하게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오던중,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경성의 탑골공원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이날 오후 2시 함께 모였던 수천명의 학생과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자,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이천만 온 겨레가 거리로 나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결사항쟁했다. 이때 경성에서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유학중이던 우리의 김정의 학생이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향리로 내려와 김정국, 윤재영,김남산, 윤주섭, 이흥돌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칠것을 결의하였다. 이날 김정의 집에서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고, 지인들과 함께 3월 24일 동리 뒷산으로 모일것을 약속하였다. 3월 24일이되니, 동리뒷산에 주민 100여명이 모여 김정국, 윤재영이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윤주섭등 주민이 맞추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날이어 두어 다음날 이상윤네 집앞으로 모일것을 약속하고, 김정의 집에서 만든 태극기를 야음을 틈타 이웃주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25일 아침이 되니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 수를 헤아릴수없이 많았으며, 인근에서는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날 장대 2개에 태극기를 높이 달고 김정의, 김남산, 이흥돌이 앞에서 교대로 들고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김정국외 수백명이 이에 맞추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장차마을 옥녀봉에서 만세를 부르고 풍곡으로 향해 당산미산에서 만세를 부른후 또 다시 거리로 진출하였다. 오후 4시경 김포경찰서에서 일본헌병과 경찰 수십명이 나와 총칼을 마구 휘두르니, 군중은 흩어지고 주동자 6명만이 체포되어, 일본헌병대에서 모진 고문과 매로 조사를 받은 후, 동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으로 압송되어,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금천광길에 의해 치안을 방해한 혐으로,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를 적용, 김정국, 김정의 징역 10월, 윤재영, 김남산 징역 8월, 윤주섭, 이흥돌 징역 6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른뒤, 병든 몸으로 고향에 돌아오니, 일경의 감사가 두려워 친척조차도 누구 하나 돕는자가 없었다. 당시 요시찰대상이였던 김정의는 일경의 감사를 피해 1920년 10월 선배인 김호철과 함꼐 만주 길림성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월곶면 고양리에 살던 독립운동가 박용의 집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정의가 보이지 않자, 그를 감시하던 일본순사들은 날마다 김정의 집을 수색하고 그의 형 김정달을 잡아가 김정의에 행방을 물으며 고문하였다. 그 후유증으로 형 김정달도 일찍 유명을 달리하였다. 일본관동군이 북상하니, 한민족은 북으로, 광복군은 중국본토로 이동할때, 김정의는 소만국경 빈강성으로 동지들과 함꼐 이주하였다가 광복군 독립단, 구국동지회, 신민회등이 좌.우로 갈등하니, 1928년 10월에 다시 길림성으로 돌아와 만주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되니, 동년 11월 고향에 돌아와, 1946년 면서기를 거쳐, 1947년 5월부터 1952년 7월까지 고촌면장을 역임하였다. 그후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핟, 1968년 향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현재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당시 씨름선수로 소문이 났던 김정국은 병든 몸을 회복치 못하고 출감후 28세를 일기로 젊은 처와 3살과 생후 6개월의 두딸만을 남겨두고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후 굶주림에 시달리던 두딸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고 젊은 처자마져 어디론가 떠나니, 가정이 멸문지화를 당해 슬픔이 한층 더 한다. 또한 윤재영은, 영사정 은행나무집에서 태어나, 동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훈장이었는데, 본래 허약한 분으로 병든 몸을 회복치 못하고, 출감후 2년만에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한편, 이흥돌은 동리에서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일가친척조차 없어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아는이 없고 공적서마져 써준이가 없어서 대통령표창마저 추서받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 금할길없다. 충절의 고장 고촌면에서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맨주먹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기록은, 고촌인의 자랑거리라 할것이다.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심을 후세에 전승하기 위하여, 고촌면민의 기미년 3월 독립만세운동 중심지인 이 자리에 유적탑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