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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나선 부인회원들은 각자의 처지대로 몸을 숨겨야 했다. 그러나 차영민이 가족과 함께 김제군 금구면 원평을 거쳐 정읍에 닿을 무렵은 이미 북한 군인들이 그곳까지 점령한 뒤였다. 대한부인회전북도본부장을 지낸 차영민과 애국청년회 조직부장 및 서북청년단 전북지단장을 지낸 김영길의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영민 가족은 다시 전주로 돌아와 중화산동 산기슭 오두막집 골방에 숨어있었으나 곧 정치보위대에 그들의 존재가 알려졌다. 북한군들은 이들 부부에게 보자기를 씌워 정강이를 후려치면서 단체 간부들의 이름을 밝히라고 갖은 고문을 했다. 차영민은 남편 앞에서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목숨을 내놓고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모든 죄를 짊어질 각오로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정치보위대에서 형무소로 옮겨졌다. 이미 부인회의 윤정희 최삼채 이금숙 김용섭 등은 형무소에 들어가 있었던 상태. 차영민은 형무소 작업장에서 이들과 마주쳤을 때도 이들의 안전을 위해 모른채 했다. 감옥생활에서도, 뼈를 깎는 듯한 모진 고문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었던 차영민과 김영길은 결국 처참한 시체로 팽개쳐진 채 발견됐다. 이러한 차영민의 장엄한 죽음을 길이 후세에 남기기 위해 대한부인회 전북회원들은 푼돈을 모아 1951년 10월26일 전주시 다가동원에 그의 순국기념비를 세웠다. - 출처 : 전북신문 '[전북 여성 인물사] 대한부인회 차영민 초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