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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루 창건 배경. 광주는 전라도의 큰 고을(巨邑)이다. 예전에 공북루(拱北樓)라는 누(樓)가 고을 치소(州治)의 북쪽에 있었는데 허물어진지가 오래 되었다. 지금 태수 죽산(竹山) 안철석(安哲石) 공이 부임한지 한해도 지나지 않아서 고을의 정사가 잘 이루어짐으로써 일이 한가한 때가 않았다. 그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고을에는 진실로 유관(遊觀)할 곳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은 고례(古例)인데, 이 고을(州)이 한 도의 요충(一道之衡)으로 사신과 손님(使客)이 빈번히 왕래하는데도 답답스럽게 막혀서 기분을 시원하게 펼 곳이 없으니 장차 어떻게 도모했으면 좋겠소" 라 하였다. 부로들이 모두 이르기를 "높고 밝아 상쾌한 곳으로는 공북(拱北)의 옛터(舊址)만한 곳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재목을 모아 집을 짓되 옛 건물보다 더 크게하여 몇 달이 채 안되어 준공을 하였다. 건물의 칸 수는 남북이 다섯 칸이고 동서가 네칸인데 넓고 밝으며 장엄하여 동방에서 으뜸가는 누가 되었다. 동쪽으로는 큰 길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대숲(脩篁)이 내려다 보이는데 누의 북쪽에 못(池)을 파 연(蓮,芝荷)을 심고 따로 동쪽에 사장(射場)을 만들어 관덕(關德)의 장소로 만들었다. 이에 비로소 손님과 주인이 누에 올라 휴식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태수(太守)의 뜻을 고을사람(邑人)들이 이루어 준 것이다. 지난 경술년(庚戌, 1430, 세종12)에 고을 사람 가운데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있어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발단이 애매(曖昧)하여 위로는 산천의 귀신과 아래로는 향촌(鄕曲)의 부로와 아이들(老幼)까지 모두 억울함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도 능히 그 일을 호소하지 못한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지금 임금(문종)의 원년(上之元年) 신미(辛未,1451) 여름에 이 고을 출신(鄕人)이 순성군 개(順城君 言+豈), 전 중추 이맹진 공(前中樞李公孟畛) 전흥 공(田公興), 우참찬 안숭선 공(右參贊安公嵩善) 이조판서 권맹손공(吏曹判書權公孟孫) 인순부윤 김청 공(仁順府尹金公聽), 전 동지중추원사 유맹문 공(前同知中樞院事柳公孟聞), 예문 제학 이선제 공(藝文提學李公先齋)등이 논의 하였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