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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표(吳剛杓)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수리를 거절하여 고종에게까지는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에 죽음으로써 을사조약과 일제침략을 항의하기 위하여 다량의 아편을 먹었으나 절명 직전에 가족에 의하여 구명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絶命詞)를 지어 가지고 금동서사(錦洞書社)의 동지 최종화(崔鍾和)를 방문하여 망국의 울분에 함께 통곡하고 조천(鳥川)에서 죽겠다고 하니 최종화가 이곳은 선비가 죽을 곳이 못된다고 하므로, 그러면 바로 명륜당(明倫堂)으로 가겠다고 하고, 연기의 조상들의 묘에 곡하여 고별하고 청주(淸州)로 가서 아들과 이별하고, 공주(公州) 명륜당으로 들어가서 절명사를 벽에 붙이고 일장 통곡한 후에 강학루(講學樓)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