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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빼앗긴 분노는 구천을 메웠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열의와 투지는 사해에 넘쳤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선생은 열일곱의 나이로 정명교 황병기 등과 뜻을 모아 엽총 등을 무기로 창의준비를 했으나 일제 헌병에게 탐지됨에 총기를 불사르고 뜻을 펴지 못한 채 뒷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8.15광복의 그 날까지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자리의 따스한 날이 없었으나 그 일편단심은 봄의 선구자 진달래꽃보다 더 붉게 타올랐음이리랴! 선생은 초계변씨 28세손으로 1889년 10월 11일 경남 의창군 진전면 양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경재요 호는 석당이다.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강하여 국정의 잘못을 통탄하더니 부산상실학교 3학년이던 1910년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잃자 최기택 성학영 등 여섯 동지와 조국광복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