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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지역 삼일만세운동. 화성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과 서역으로 들고 나는 문물교역의 뱃길이 시작되던 곳으로 문화교통의 거점이었으며 시국상황 정보에 민감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바다를 개척하며 외적의 침입에 적극 대항하는 충,효,예,향의 정서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나라사랑 정신이 강인한 고장이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같은 해 3월 3일 치러진 인산을 참관하고 돌아 온 홍효선등은 서울에서의 삼일만세운동 체험과 삼일독선언문을 비밀리에 송산 지역에 전파하였다. 3월 4일 수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는 5일장 장사꾼들에 의해 구전되어 일부 인사들은 이미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소식을 인지하고 있었다. 사강장터만세운동을 주도한 35세의 홍면옥과 그의 동생 홍준옥, 문상익은 당시 송산면 서기들로 3월 10일 경 매일신보를 통해 독립만세 소식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홍효선, 홍면옥, 이규선등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26일 오전 9시 사강리 구장 홍명선의 집에 모인 120여 명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 소식을 알리고 일경에 붙잡혀도 주모자를 발설하지 말 것을 설득하였으며, 각 마을에 연통을 숙의하여 3월 28일 사강 장날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26일 오후 5시경, 송산면사무소 뒤 숲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왕광연, 홍명선, 홍봉근, 홍복릉, 홍준옥, 김교장, 김도정, 김용준, 차경헌, 진순익, 이순일, 이윤식, 최준보, 안순원, 오광득, 정군필, 김병준, 김성실, 일팔용 등 2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날 일경들이 주동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홍면옥, 홍효선 등을 찾아다니자 이들은 구봉산으로 숨어들었다. 3월 27일, 옥일리 굴고개 방향에서 전날 사강에서의 만세시위에 고무된 서신면 주민 4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3월 28일 사강잘날(당시 3일, 8일), 이른 아침부터 평소와 다르게 장꾼들과 수많은 마을 주민들이 두레농기를 앞세우고 장터에 모여들자 사강주재소에서는 상점의 철시를 지시하였다. 이미 전날의 만세시위 소식에 술렁이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오전 10시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오전 11시경 홍면옥 등을 중심으로 1천 여 군중이 국권회복을 위한 태극기를 치켜들고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 계속하여 서신 방면과 종송리 방면 주민들이 대한독립이라 쓴 태극기를 들고 몰려와 만세시위 군중은 2,0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일경들은 홍면옥, 이규선, 예종구등을 붙잡아 주재소에 무릎을 꿇려 앉혀두었으나 오후 3시경 갑자기 홍면옥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자 노구치가 권총을 발사하여 어깨 관통상을 입었다. 성난 만세군중이 주재소를 포위하여 돌을 던지며 만세시위가 더욱 격해지자 일경들은 총을 쏘며 군중을 해피고 자전거로 남양 방면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자건거를 타고 달아나던 일본인 순사 부장 노구치가 군중들이 던진 돌에 맞아 쓰러지자 200~300여 명의 주민들과 홍준옥, 문상익, 임팔용, 강업동, 왕광연, 박영순, 김지연, 이주선, 예종구 등이 달려들어 돌과 몽둥이로 처단하였다. 한편 노구치가 피살된 후 홍면옥은 장인 김명제, 동생 홍준옥 등과 인력거를 타고 총상을 치료하기 위해 남양의 한 병원으로 향하던 중 마도부근에 이르러 수원경찰서에서 급파된 순사부장 겐타로 일행에게 체포되었다. 그 결과 임팔용, 홍면옥 외 28명이 체포되었다. 홍효선, 전도선, 이태순, 이석준, 오경운, 예종구 등은 체포되지 않았으나, 5월 9일경 집으로 돌아온 전도선, 안순원, 오경원, 이윤식, 김병준, 정군필은 페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