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page


66page

會長 車英玟 女史 殉國記念碑(회장 차영민 여사 순국기념비)
66page

독립촉성애국부인회장이자 대한부인회 초대회장으로 문맹퇴치 등 맹활약을 벌였던 차영민은, 지도자의 참모습을 보여준 여성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아끼던 차영민의 정신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를 기억하는 한국부인회(대한부인회 후신) 후배들도 부인회를 떠나고 차영민 후손들도 연락이 닿지 않아 이 지역 후배 여성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다. 차영민은 1890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해서 서울 정신여숙 1회 졸업한 뒤 고향에 돌아가 줄곧 교회에서 일을 보면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평북 선천 출신인 김영길과 결혼했다. 34세에 전북 전주에 미리 월남하여 목회일을 보고 있던 부친의 권유로 남편과 함께 3남1녀를 데리고 월남하여 그해 넷째 아들 광호를 낳았다. 남편 김영길은 해방이 되자 전주에서 독립촉성회 조직부장과 서북청년단 전북지단장을 역임했고, 당시 전주완산교회 집사로서 차영민도 1946년 여성단체인 독립촉성애국부인회가 발족되자 이 부인회에 나갔다. 인품이 훌륭하고 열의가 대단해 부인회원 모두 차영민을 존경하게 되고 따라서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당시 초대 전북도 부녀계장인 윤경옥이 차영민을 적극 지원, 부인회 조직결성 전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차영민은 이 때 전북 여성계에 혜성처럼 나타나게 된다. 회장이 된 차영민은 부회장에 전유택, 총무에 임영자, 부총무에 윤정희, 서기에 이재경을 임명하고 최삼채 박남수 오금주 김영신 김근월 이금숙 등의 열성회원들과 함께 도내 3시 14개군(당시 행정구역)을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부인회를 조직하여 여성계몽과 자질향상에 밑거름 역할을 하였다.
66page

한글을 모르는 여성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쳤고 귀환해온 동포들에게 그들이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데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매일 동분서주 하였다. 남편 또한 귀환동포 원호회장직을 맡아서 자신이 운영하던 약방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부부가 함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어다니는 통에 가정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정읍에 살고 있던 김채봉이 남편의 직장이 전주로 이동하게 되자 생활근거지를 옮겨와 전주에서의 여성운동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차영민은 1949년 봄 독립촉성애국부윈회가 해체되고 대한부인회가 생긴 이후에도 전북도본부의 초대회장을 맡았다. 6·25 사변 이틀 뒤인 1950년 6월27일 대한부인회전국총회가 있는 날. 25일 새벽 등화관제가 있었고 무언가 석연찮은 어수선한 시국인데도 미리 예정된 행사였으므로, 차영민은 김채봉 양난초 등과 함께 전북도내 시군회장 등 임원 26명을 인솔하고 다음날인 26일 아침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무려 20여시간이나 걸려서 27일 새벽에야 서울역에 도착했다. 역에는 각 도에서 올라온 부인회 임원들이 있었다. 피난민과 무장한 군인 군용차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앞두고 서울YMCA 회관에 있는 총본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몇명이 모여 있다가 "각 역마다에 총회 연기를 알렸는데 연락을 못 받았느냐”며 깜짝 놀랐다. 차영민 등은 서로 흩어지지 않기 위해 허리에 끈을 맨채 암표 차표를 구해서 아귀다툼의 틈새에 끼여 이리역에 도착했다. 이 때는 이미 한강다리가 끊겼던 때. 이로부터 20일 뒤 북한군은 전주에 내려와 먼저 차영민 내외를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차영민은 7월17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정읍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