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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 • 여성 3·1운동 65 이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도 체포되었다. 2 개월 동안 고강도의 심문을 당하고 기소되었다. 5 월 27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이른바 ‘보안 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김향화는 개성 만 세운동을 주도했던 권애라와 함께 같은 감방에서 옥 고를 치르며 권애라에게 ‘개성 난봉가’, ‘평양 수심 가’와 같은 타령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는 10 월 27일 가석방으로 서대문감옥을 나왔으나, 일제 의 감시로 더이상 기생을 할 수 없었다. 생계유지조 차 곤란했기에, 1934년 김우순(金祐純)으로 개명하 고 이듬해 서울로 이사했다. 하지만 이후의 삶에 대 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009년 정부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만세운동을 견인해 낸 여성들 일제강점기 여성은 피식민지인에 대한 일제의 핍 박을 견디면서, 동시에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국권(國權)을 잃어버린 ‘조국’ 앞에 민족 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선경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비밀결 사에 참여해 구국활동에 헌신하였다. 조화벽은 개성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양양 만 세운동을 이끌어냈다. 수원에서는 김향화가 멸시와 천대를 받던 기생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획·주도했 다.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위생’을 앞세운 일제의 비 인간적이며 폭압적인 통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었 다. 이들뿐만 아니라, 3·1운동 당시 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학생들과 기독교계 여성들은 만세운동 계 획과 준비과정에서 독립선언서 전달, 태극기 제작, 동지 규합 등을 담당해 만세운동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참여주체를 확대하는 동시 에 우리 스스로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와 역량을 확 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민족차별적 식민교 육에 저항했고, 농민ㆍ노동자들은 수탈적 노동 요구 에 강경 대응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비밀결사가 활발히 조직되었으며, 독립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얻 은 청년들은 만주(중국 동북지방), 러시아 연해주(沿 海州) 등지로 나아가 독립군이 되었다. 이렇듯 1919년 봄 한라에서 백두까지 울려 퍼진 만세소리는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 최전선 에 이선경, 조화벽, 김향화가 있었다. 3·1운동 당시 여학생들의 종로 일대 만세행진 광경(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