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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 • 한국광복군 창설 65 하지만 광복군이 추진하였던 국내진입작전은 일 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미처 실행되지 못하였다. 8월 9일 시안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한 김구는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 도 다 허사다”라고 탄식하였다. 대신에 광복군은 국내정진군을 조직하고 그 선발 대로서 국내정진대를 서울로 진입시켰다. 하지만 일 본군의 서울 진입 불허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군이 미국 OSS 와 합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한 것은 광복군 인 면전구공작대가 영국군과 합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광복 직전 광복군이 거둔 귀중한 성과였다. 역사적 의의 한국광복군은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지향했던 임 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광복군은 대한제국 의 국군과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했던 독립군을 계승 하였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30여 명으로 출발한 이 래 열악한 물적 · 인적 기반과 중국이라는 타국 영토 에서 활동하는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통 해 국제적 여론을 끌어내고 국내외 동포들에게는 광복 군의 활동과 한국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알렸다. 창설 당시 수십명의 병력으로 시작한 광복군은 일제 패망 무렵에는 1천 명에 가까운 인원을 확보한 정규 군으로 발전하였다. 국제적으로 한국광복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연합 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대일전쟁을 전개함으로써, 전후에 교전단체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전략을 추구 하였다. 그 일환으로 광복군은 인도버마전선에 공작 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을 수행하였 다. 또한 미국 OSS와 합작하여 특수훈련을 받은 광 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하 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 규모나 실현 여부를 떠 나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쟁취하 려는 자주적 독립의지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 다. 서울의 여의도비행장에 진입했다가 중국 산둥반도 웨이선(濰縣) 을 떠나 웨이하이비행장(威海機場)으로 귀환한 후 기념촬영한 한 국광복군 이범석 지대장과 미군, 중국 국민정부군 일행 대한민국 27년(1945년) 9월 30일 한국광복군의 ‘이글 프로젝 트’가 공식으로 해체되기 하루 전에 미군과 함께 촬영한 사진. 1 열 왼쪽부터 노태준 제2지대 제2구대장, 싸전트 대위, 이범석 장 군, 안춘생 제2지대 제1구대장, 노복선 제2지대 제3구대장. 3열 왼쪽 두번째부터 이재현 공작조장, 김성근(이상 나무위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