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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 최세윤 · 정원집 · 김영백 의병장 65 대를 분산 배치하였다. 서종락을 청송 주왕산, 이세 기를 영천 보현산, 우재룡을 영천 팔공산, 정순기를 포항의 북동대산에 배치한 것이다. 그는 이들과 서 로 돕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형성하여 유격투쟁으 로 일제 군경을 괴롭혔다. 당시 최세윤이 이끄는 본 진은 선봉장 백남신, 중군장 권대진, 후봉장 최치환, 소모장 박완식 등으로 지휘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흥해를 비롯한 청하 · 청송 · 영천 · 의성 · 경주 · 영해 등 경상북도 산간과 연해지역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 개했고, 규모는 대략 100명 내외였다. 최세윤이 주도한 산남의진은 1908년 3월 25일 흥 해 덕산령 전투에서 중군장과 참모장 등 지휘부를 포함한 의병 12명이 전사하고 8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에는 일본 군경이 파 견한 밀정과 변장대(變裝隊)에 의해 상당수의 의병 들이 체포되거나 피살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세윤의 큰아들 최산두(崔山斗) 역시 이 과정에 서 체포되었다. 그는 부친의 소재를 파 악하려는 일본 경찰의 집요한 심문에 도 함구로 일관하다가 종신형을 선고 받아 순국하였다. 한편 최세윤은 일시 잠복하여 일제 군경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였다. 행적 이 묘연하던 그는 경북 장기군(長鬐 郡) 내남면 용동(龍洞)에 살다가 1911년경 체포된 것 같다. 1911년 12월 그는 대 구공소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 았으나, 얼마 후 5년 3월로 감형되었 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13도창의대진소 전국 연합의병부대의 서울 진공작전을 기념하기 위한 13도 창의군탑(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소재) 프랑스 언론 『르 프티 주르날』에 실린 「한국에서의 소란」기사 화보. 1907년 8월 해산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의 남대문 전투 모 습을 그렸다(위키피디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