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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의 동향과 집의계(儒林的动向和集义契)
19세기말 제주의 유림은 대원군을 탄핵하다가 제주에 유배된 최익현(崔益鉉)의 영향을 받아 기호학파의 맥을 이었다. 또한 전라도 장성의 기우만(奇宇萬)을 사숙하였다. 그들은 위정척사 의 명분 아래 신학문의 수용에 뚜렷이 반대 입장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귤림서원 등이 폐지됨으로써 유생들의 결집체는 와해되어 버렸다. 갑오. 을미개혁에 따른 신식 행정제도의 실시와 단발령의 단행에 반발해 건양 원년(1896) 제주군 한북리(漢北里) 유생 강유석(姜瑜奭)과 송계홍(宋啓弘) 등이 민란을 일으켜 경무청을 파괴하였는데, 이는 당시 유생층의 불만을 대변한 것이었다.
제주의 유림들은 을사조약과 국권 피탈을 겪으며 항일의 의지를 담은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고 문연사(文淵社)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들 유림의 정신적인 맥을 이어서 1909년 의병항쟁과 1919년 조천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대마도로 호송되어가는 최익현(1906년) / 조설대-을사조약에 대항하여 이응호를 중심으로 12인의 제주 유림들이 집의계를 결성한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