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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는 1895년 경성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1902년 이후 강화진위대장으로 활동한 후 1906년 강화에 보창학교를 설립하였고, 1906년 대한자강회를 설립하는데 관여 하였으며, 1907년 군대해산 무렵 연기우, 김동수 등과 강화도에서 의병항쟁을 하였고, 헤이그밀사사건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로 피체되어 5,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08년 서북학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1907년 이후 신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다 피체되어 황해도 무의도에 3년간 유배되었다가 1912년 탈출하여 북간도로 망명 소영자에 광성학교를 세워 계봉우와 민족교육을 실시하였고, 1913년 연해주로 건너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권업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14년 왕청현 라자거우에 대전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사관의 양성에 주력하였고, 1917년 연해주로 갔다 독일 밀정의 혐의로 피체되었다가 수 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1918년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으며, 1919년 삼일운동 후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에서 선전부장에 피임되었고, 동년 8월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활동하였으며,1921년 임정에서 이탈하여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에 관여하여 1922년 국민대표회 집행위원, 1924년 국민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1922년과 23년에는 꼬르뷰로(고려국) 및 오르그뷰로(조직국)의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1923년 2월과 3월에 적기단과 조선공화정부를 조직하였으며, 1928년 경 원동변강 모쁘로(국제혁명운동희생자구원회)의 지도원으로 활동하다 1935년 작고한 사실이 확인됨. 출처 : 보훈처 공적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