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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6년 3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3월의 독립운동 15세가 되었을 무렵 궁핍한 경제 상황으로 인해 홀아비 정도성(鄭道成)에게 시집을 갔으나, 3년 후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생활은 더욱 막막해졌다. 생계 방편을 찾아야 했다. 결국 가족 부양을 위해 기적(妓籍)에 ‘향화(香花)’라는 이름을 올렸다. 그는 검무, 승무, 궁 중무용 등 각종 전통 춤뿐만 아니라 가사, 시조, 경 성잡가 등 각종 소리에도 출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8년 발행된 『조선미인보감』에 실려 ‘수원 기생의 꽃’으로 소개될 정도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엿새 뒤인 1월 27일 수원 기생 20여 명을 데리고 상경했다. 이들은 소복을 입고 짚신을 신은 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통곡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도 3월 4일부터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수원에서는 만세운동이 정보 누설로 인해 계속 좌절 되고 있었다. 드디어 3월 25일 수원읍내를 시작으로 송산면 사강리를 비롯해 수원군 내 각지에서 만세운 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김향화는 선배 기생 서도홍(徐桃紅)과 함께 만 세 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수원기생조합 기생들에게 은밀히 연락하며 동지들을 규합해 갔다. 30여 명이 동참했고 뜻을 모아 3월 29일을 거사일로 결의했다. 그 날은 경기도 경찰의 강압 아래, 수치심과 모멸 감을 불러일으키는 정기 성병검사가 자혜병원에서 실시되는 날이었다. 자혜병원은 주요 기관이 밀집한 수원 읍내에 있었기 때문에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경찰의 의심을 피하며 읍내 중앙으로 들어갈 수 있 었다. 3월 29일 김향화와 동지들은 이미 제작해 둔 태극 기를 숨기고 자혜병원을 향해 나아갔다. 병원 앞에 다다른 30여 명의 기생들은 태극기를 높이 치켜올 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곧장 병원을 나와 수원경찰서 앞으로 향했다. 군중이 모여들었 다. 상인, 노동자, 기독교인 등 300여 명이 넘는 군 중이 읍내 각지에서 만세를 고창했다. 일본인 상점 에 돌을 던지고 관공서를 파괴하는 등 강렬하게 시 위했다. 일제 경찰은 18명을 체포했다. 김용순(적색 네모표기) 등 강화 3·1운동 참가자 판결 보도(『매일신보』 1919.12.20,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