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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5년 9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9월의 독립운동 인도 현지에 도착한 공작대 대원들은 영국 인도군 총사령부에서 영어와 방송기술 교육을 받았다. 교육 을 마친 대원들은 영국군에 분산 배치되었다. 일본 군과 접전하고 있는 최전선에 투입된 공작대는 일본 군에 대한 선무공작, 후방지역의 교란, 일본군 포로 의 심문, 노획한 문서의 번역 등 전쟁수행을 돕는 임 무를 수행하였다. 공작대는 1944년 초부터 영국군과 일본군이 대접 전을 벌였던 임팔 전투에 투입되었다. 당시 연합군 측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이른바 버마공로(滇 緬公 路, Burma Road) 탈환작전을 전개했는데, 이 작전 이 임팔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공작대는 임 팔방어작전에 참여하여 대적선전, 포로 심문, 적 문 서 번역 등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영국 신 문들은 이들의 활약상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1945년에는 버마에서 일본군을 축 출하는 버마 총반격전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작 대의 활동은 일본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영국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은 한국광복군이 인도- 버마에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작전을 전개하 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공작대는 1943년 8월 인도에 파견된 시기부터 1945년 7월 인도-버마 지역에서의 활동을 종료할 때까지 2년간에 걸쳐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참 여하였다. 공작대는 일제가 항복한 후 충칭의 한국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공작대의 활동은 영 국군이 대일작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아가 한국독립운동의 공간을 확대하였다는 측면 에서도 주목되는 것이었다. 한미합작과 국내진입작전 추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임시정부는 미국정부 혹은 주중 미군사령부에 대해 한인의 대일 전 참여를 지속적으로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의는 광복군이 오랫동안 지향해왔던 국제적인 독립전쟁 을 전개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광복군은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면서 북상하고 있는 미군과의 합작을 모색하였다. 그 결 과 1945년 미국 OSS와 합작, 광복군 대원들을 훈련 시켜 한반도에 투입하여 정보수집과 게릴라 활동을 전개한다는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였다. 한미양측은 시안 주둔 한국광복군 제2지대 본부 에 훈련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였 다. 합작훈련 제1기 훈련생으로는 한인 학병출신들 과 기존의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 중에서 50명의 적 격자들이 선발되었다. 주된 훈련내용은 이들이 한반 도에 침투해서 적의 중요군사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 집하고 다시 이를 무전으로 중국으로 타전하기 위한 첩보훈련과 통신(무전)훈련이었다. 그 밖에 일본에 대한 심리전 기술, 연합군의 공중폭격이나 상륙작전 을 전개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기상학교육도 포 함되었다. 8월 초 제1기 훈련생들이 엄격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수료하였다. 1945년 8월 5일, 김구 · 이청천 · 엄항섭 등 임시정 부 및 광복군 수뇌부로 구성된 시찰단은 시안으로 가서 광복군 훈련생들을 사열하고 격려하였다. 8월 7일 김구는 시안에 와 있던 워싱턴의 OSS 총책임자 인 도노반과 한미공동작전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였 다. 한미 양측은 회담에서 한반도를 목표로 하는 공 동작전의 조속한 실행에 합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