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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5년 3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3월의 독립운동 만세 군중을 진압했다. 3월 7일부터 군 병력을 분산 배치체제로 바꿔 수시로 이동시켰다. 4월 7일경 헌 병 장교 이하 65명, 헌병보조원 약 400명, 4월 10일 이후 6개 대대가 일본에서 증파됐다. 일제의 탄압으로 무력 발포가 254건, 총검 등으로 시위대를 살해하거나 부상을 입힌 것이 41건, 곤봉 이나 소방도구 기타 무기 사용이 10건, 방화 3건 및 파괴 4건이 자행됐다. 체포된 한국인들은 주재소에 서 1차 신문조사를 받은 후 경찰서, 헌병분견소 및 분대로 압송되어 제2차 신문조사를 받았다. 폭행, 고 문 등의 악형을 당한 후 훈방되기도 하고 경찰서장 이나 분견소장 및 분대장의 즉결처분으로 30~90도 (度)의 태형을 당했다. 무력 진압 다음으로 태형은 직 접적이고 즉각적 탄압 효과로 3·1독립운동을 약화시 키는 주요 수단이었다. 검찰의 기소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은 사법적 탄 압을 받았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 행태로 인해, 3월 4일 평남 원장-사천시장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조진 탁 · 최능현 · 송현근 · 차정신 4명이 사형, 임원걸 · 서영 석 등 16명이 무기징역 또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았 다. 이처럼 최고형이 선고되었다는 점에서 탄압의 수위를 짐작할 수 있다. 3월 18일과 19일 경북 영덕 의 영해와 창수의 독립운동 참여자 170명은 대구지 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4월 1일 경기 안성의 원 곡-양성 독립운동 참여자 125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최고 징역 12년까지 선고받았다. 일제와 일본인 피해의 배상을 청구하는 사소(私 訴)가 제기되기도 했다. 3월 18일 경북 영덕 영해에 서 시위자 18명에게 14,252엔이 청구되었고, 3월 21일 안동 임동에서 유동수 등 26명에게 1,000엔이 청구되었다. 4월 1일 경기 안성 양성에서는 주재소, 우편소, 일본인 2명(제1~4호)이 만세 시위자들에게 6,561엔 68전을 청구했다. 1919년 10월 경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경기도박물관 제공) 조소앙이 1919년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10조의 초안(조소앙선생기념사업 회 제공). 오른쪽 첫 줄에 「대한민국임시헌장」이라 썼고, 이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 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등등으로 10조까지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