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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4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라 1일 6면에 국문 전용의 한글판과 영문판 을 같이 수록하여 발간하다가 1905년 8월 11일부터 국문판은 국한문 혼용의 『대한매 일신보』로 바꾸고 영문판은 별도로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라는 제호 (題號)로 나누어 발행했다. 1907년 5월 7일 부터 국한문 전용판으로서 『대한매일신보』 를 역시 별도로 발행했다. 이 신문은 당시 영 국인 명의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일제 한국통 감부 당국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고, 또 일본 관헌의 사옥 출입을 금하는 방을 붙이기도 했다. 1907년 1월 16일에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 언한 고종(광무황제)의 친서가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에 전달되었다는 사설을 크 게 보도했으며,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 日也放聲大哭)』을 이튿날 즉각 전재하고 영 문판에도 영어로 번역 게재하여 세계에 알 렸다. 또한, 1909년 10월 26일에 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처단되었다는 소식을 호외로 보도 했으며,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위 해 간행된 영문판은 일제 침략상 과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 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다른 신 문에서는 일제의 소위 「신문지법」 에 따라 의병항쟁을 보도하지 못했 으나, 『대한매일신보』는 상세히 게 재하였다. 또한 1907년 5월 23일 부터는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일반 국민들 을 위해 한글판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였다. 1908년 5월 당시 발행부수는 한글, 국한문영 문판을 합쳐 13,400부였으며, 지사는 1907 년 11월 모두 32곳이었다. 국채보상운동 추진하다가 투옥돼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 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대한매일신보』 에서는 신문사 안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總合所)를 개설하여 많은 보상금을 모금하였 다. 일제는 당시 총무직을 맡고 있던 양기탁 을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 없는 혐의 를 씌워 구속했으나, 사장인 베델이 증거를 들어 허위 조작된 것임을 증명함으로써 2개 월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1907년 4월에는 안창호와 함께 구국운동 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였 다. 창건위원은 그를 비롯하여 전덕기·이동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일명  105인 사건)을 보도한 『신한민보』 보도 기사 「억지로  꾸며낸 소위 음모사건 심판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