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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4년 3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3월의 독립운동가 을 우려하여 교사들과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에게 교 칙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경고했다. 그럼에도 3월 11일 저녁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같은 학교에 교사로 있던 여 선교사 호킹과 함께 학생들을 귀가시키기 위하여 찾 아 나섰다.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나 귀가시 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와 20분 쯤 되었을 때 집으로 찾아온 6명의 순경들에게 체포 되어 부산경찰서에 구금·취조를 받았다. 12일 취조시 받은 질문은 학생들의 출석부가 어디 있느냐는 것과 학생들이 만든 태극기의 존재를 알 았느냐는 두 가지였다. 출석부는 집에 있다고 답하 여 압수당했고, 태극기의 존재는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13일 취조를 담당했 던 심문관은 데이비스의 집에서 태극기가 발견되었 다고 알려주고, “일본과 영국의 동맹관계의 견지에 서 이런 종류의 사건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 면서 서장의 면담이 있은 후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면담에서 서장은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요구했지만, 데이비스는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가 그러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다음 날인 3월 14일에도 멘지스와 호킹과의 대조 심문을 위해 법정에 불려가 심문을 받고 석방되었 다. 15일 오후에도 부산진파출소에 소환되어 관리들 과 약 12명의 헌병경찰에게 둘러싸여 약 1시간 동안 3월 11일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데이비스는 1919년 3월 17일 “부산진과 부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진술서(3월 11일 밤부터 3월 15일 저녁까지)” 를 작성하여 이 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기독교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호주 장로회는 신사참배를 강요받는 학 교를 경영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데이비스 는 1940년까지 동래에서 일신여학교 교장과 교육선 교사로 활동하다가 정년 은퇴로 귀국하였다. 1963 년 6월 빅토리아주 딥딘(Deepdene)에서 76세로 별 일신여학교 교장 마가레트 데이비스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