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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2월 적지 심장부 일본 동경에가서 일본제국주의의 총수들 앞에서 서른 네살인 식민지 청년 여운형은 천재적 두뇌와 현하의 웅변으로 조선독립의 절대 필요성을 마천하에 역설했다. 삼천만 구국동포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만방에 비상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의 여운형 청년의 열렬한 독립투쟁이야말로 가히 항쟁의 예술이었다. 1929년 여름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하자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추대되어 음으로 양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당시 조선총독부 요시찰 인물 제1호였다. 여운형선생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고 여운형 그 이름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다. 1944년 여름에는 독립운동 지하단체인 건국동맹을 결성해 내일에 대비했다. 8.15해방이 되자 조선인민의 뜻을 총집결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건만 미군과 친일경찰의 혹독한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초하는 비운을 맞았다. 몽양선생은 양심적 지식인과 중산층을 대표하는 조선인민당을 창건해 통일 건국에 매진했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으로 1946년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선생은 김규식 박사와 좌우합작운동을 벌여 미.소공동위를 성공시키려고 불철주야 노심초사하시다가, 1947년 7월 19일 겨레와 역사를 거스르는 흉탄에 오호라 선생은 62세를 일기로 불귀의 나그네가 되고 말았음이여! 여운영선생은 대 선각자요 열렬한 반일독립투사요 걸출한 대 애국자였다. 그 명문대가도 사라졌고 애국애족의 거성도 간 이자리애 양평군민들의 거룩한 뜻을 모아 이 비석을 세우나니 반백년 분단을 마감하고 남북 대 통일을 염원 갈망해 마지 않는도다.
하늘이여 역사여 굽어 살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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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476번지 속칭 묘꼴. 위대한 몽양 여운형선생이 1886년 음력 4월 22일 부 여정현님과 모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신 곳이다. 기호 양반가옥 덩실한 명문대가의 옛집은 비정한 6.25병화로 온데간데 없고 쓸쓸한 폐허만 남아 보는 이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뒤편 오백년 묵은 향나무와 앞쪽 삼백년 묵은 은행나무, 오동나무, 잣나무가 저렇듯 우뚝서서 철따라 푸른 옷을 떨쳐입고 살랑살랑 잎새를 흔들어 그 옛날의 전설을 말해준다. 아래 편 철쭉과 옥잠화 무더기도 봄마다 잊지않고 환히 꽃술을 피워 올려 옛터의 흥망성쇠 절절한 사연을 소곤소곤 속사여 준다. 뒷산 묏줄기 함양여씨 역대 조상들의 넋이 폐어터를 내려다보며 당장 현대사를 바로잡으라고 꾸짓는다. 몽양 아기는 태어나랄때부터 왕재라 불리울 만큼 용모가 출중 비멉 미려했다. 속뜻 또한 남달리 뛰어나 약관의 나이에 노비를 해방하는등 봉건유습을 과감히 타파했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구국일념을 안고 중국으로 망명 눈부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당인 신한청년단을 만들어 삼일운동의 진원을 울렸다. 한편 김규식박사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독립을 호소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심혈을 기울였고 외무위원과 9대 의정원 의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