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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복(당시30세) 진주시 나동공원묘지에 안장 1965년 경남 통영 출생 1984년 경상대 사회학과 입학 1991년 경상대 총학생회 연대사업국장 1993년 전국농민회 총연맹 경남도 연맹 간사 1994년 2월 1일 고 손구용 동지와 함께 서울 농민대회 참석 도중 함양군 형남주유소 근처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운명 |12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김영삼정권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94년 2월 1일“UR재협상, 국회비준거부, 농업대개혁 쟁취를 위한 전 국농민대회”참석을 위하여 진양군 농민회 사무실에서 아침 6시 25분경 서울로 출발하였다. 전농의 지침에 따라 도 방송차량을 가지고 올라가야 했다. 이 방송 차량을 손구용, 김순복 동지가 맡기로 하고, 진양군 농민회 본대 버스 뒤를 따라 손구용 동지가 운전하는 1톤 트럭이 진주에서 김천 방면으로 동시에 출발하였다. 산청군의 도로는 전날 내린 비와 눈으로 얼어 빙판길이었다. 두 동지가 탄 차량 이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 남효부락앞 S자형 커브지점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반대편 언덕쪽으로 추락지점에서 느티나무(지름 약 30㎝)와 충돌하여 동지는 두 개골 파열로 즉사하였으며 손구용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경상대학교 부속병원으 로 옮겼으나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다 저녁 8시 50분경에 운명하였다. 당시 전국농민대회는 전국농민회총연맹, 한국여성농민회총연합, 한국농어민후 계자중앙연합회, 농민단체협의회 등 어느 지역 어느 단체 할 것 없이 농민이라면 누구나 한 마음 한뜻으로 모였다. 농민들은 자식보다 소중히 여기는 농사일을 제 쳐두고 오직 UR 재협상 쟁취, UR 국회비준거부를 목표로 모인 것이다. 이와같은 취지아래, 진양군 농민회에서도 서울 대학로를 향해 진주를 떠났고 도중에 함양 근처 국도에서 예기치 않은 참변을 당하였다. UR을 반대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우연한 사고로 받 아들일 수 없다. 열사의 죽음은 우연한 것도 사고에 의한 것도 아니다. 열사의 죽 음은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에 굴복한 김 영삼 정권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끝내살리라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