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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홀에는 유일한 박사의 흉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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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은 서울 사람이다. 평남 평양(平壤)에서 출생하여 박용만(朴容萬)의 숙부 박장현(朴章鉉)이 평안도 선천(宣川)에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박용만으로부터 국어·일어·산술·중국고전 등을 배웠으며, 1905년 2월 박장현과 박용만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미국행을 결심하자, 이들의 제자였던 정순만(鄭淳萬)의 아들 정양필(鄭良弼)·이종철(李鍾澈)·정한경(鄭翰景)·유은상(柳殷相)·이희경(李熙景)·이종희(李鍾熙) 등 후일의 한인소년병학교 동반자들과 함께 도미길에 올랐다. 도미 후 1906년경 박장현·정한경·정양필 등과 함께 미주 중서부지역인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이주한 그는 1909년 6월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 설립한 미국내 최초의 한국독립군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에 입교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1911년 헤이스팅스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 만에 졸업하였다. 1916년 미시건주립대학 상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中央總會)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게 되자, 재미한국인 대표로 선출되어 동 대회에 참가하였다. 동 대회에서 기초작성의원회(起草作成議員會) 대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작성·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열강에 호소하였다. 1919년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세계적인 전기회사(電氣會社)인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회계사로 근무하면서 1920년 한국친구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보스톤지부 비서로 활동하면서 한국친구회(韓國親舊會)에 운영자금을 기부하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친구회의 가입을 권유하는 등 동회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 후 1922년 대학동창생인 스미스와 함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La Choy) 식품회사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하자, 1924년 국제무역회사인 유한주식회사(柳韓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서재필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 구매차 중국 상해를 거쳐 북간도지역을 순회하며 21년만에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기도 하였다. 1925년 세브란스의전(醫專)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청을 받은 그는 회사를 정리하고 192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12월 서울 종로에서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창립하고 초대 사장에 취임하여 의약품·위생·화장품·농기구·염료 등 사업을 다각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28년 동아일보 지상에 최초의 염료 광고, 최초의 약품광고를 게재하여 큰 수익을 올리는 사업 수단을 발휘하는 한편, 보스톤에서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란 책자를 출간하여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과 교역을 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그는 귀국한 지 12년 되던 해인 1938년 4월 재차 도미하여 사업 활성에 전력하는 한편, 1941년 남가주대학(USC)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동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企劃硏究部)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金容成), 이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한 곧 이어 동년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비무장전투법·지도읽기·파괴·무전·촬영·낙하산훈련·비밀먹 사용법·선전·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정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