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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계획하에 일본 경도로 밀행 잠입후 학생의 신분으로 낮에는 행상 밤에는 야간대학생으로 있으면서 항일투쟁에 끊임없는 노력으로 동포학생들을 선동사키고 한편으로는 상해임시정부요인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자금난에 모금운동까지도 암암리에 활약하였었다. 그런 고난속에도 교묘히 일경의 눈을 피하여 1935년 4월에는 상해로 피신하여 상해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는 7년간 황일구국운동에 협력하였으며 1942년 8월에는 임시정부의 특명을 띄고 국내로 암입하려다가 여의치못하여 일본 구주로 상륙중 일경에 체포되니 일경은 공을 국내로 압송하여 대전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공주형무소에 투옥데였었다. 공주에서 2년형기를 마치고 나오니 일경의 감시가 혹심하여 할수없이 상경하여 다행히 경도신문사 총감부 출입기자로 취직하였다가 그런 고초후에도 초지일관 일제관헌의 눈을 속여 비밀정보를 수집하다가 서울 성동경찰서 고등계형사 사토에게 연행되어 경찰에서는 악독한 조사에 배후조종자를 말하라하고 태심한 고문을 하였다. 그러나 공은 모두가 나라를 빼앗긴 원한과 우리민족 학대에 분통을 참지못하여 독립을 주장한것이지 배후에는 아무도 지시한바없다하고 일절 함구부답하였다. 공은 태심한 고문에 견디지 못하여 평생의 한을 풀지 못하고 1945년 1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치어 순국충성을 다하였으니 시년이 35세라 생전에는 나라빼았긴 슬픔으로 나라찾기위한 의리는 천금일신을 홍모와같이 가벼이 여기었고 사후에는 주권없는 국민에게 다시 주권을 갖게하여 전통 민족정신의 정혼을 크게 일깨웠으며 또한 고무 격동시키였다. 정신은 만세에 밝히고 그 공적은 천추에 빛났으니 참으로 숭고한 애국지사라 않이할수 없으며 우리 온 국민은 기리 기리 추앙하여야만 할것이다. 부인 남양홍씨간에 장남 훈병을 양육하여 훈병이 성장하매 청풍김씨가에서 취처한바 불행 조년에 별세하여 슬하에 무육함으로 공지질 창주를 입양하였다. 공의 유해는 곧 고향인 몽촌으로 운구되어 몽촌서 울측좌원에 안장되었다. 그후 8월 15일은 민족 대망의 건국 광복절을 맞아히게 되니 향토 유지인사가 공에 순국충절의 사적을 모집하여 정부에 제출하였다. 1977년 12월 1일 국가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추서 책정하고 동년 동월 13일 포상및 훈장패를 수여하였다. 1984년 6월 정부에서는 공의 묘역정화와 사적비비 건립기금으로 일금 일백만원이 하달되어 덕산면에서는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방인사들의 정성어린 성금과 채씨문중의 성금을 합하여 채지사의 애국충절을 이세상에 높이 현양하고 그 찬연한 공적을 후세에 기리 기리 추모하기 위하여 독립투쟁사록에 의거 이글을 쓰고 온 국민의 귀감이 되도록 이에 사적비를 세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