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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 • 여성 3·1운동 63 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제 경찰에 맞섰다. 군중의 강한 저항에 일제 경찰은 총을 발포하며 무력을 행 사했고 이로 인해 권병연(權炳淵) 등 사상자가 발생 했다. 4월 중순 조화벽은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해 양 구로 피신했다.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잦아 들자 개성으로 돌아가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하고 공 주 영명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공주에서 영명학교 교사 황인식(黃仁植)이 돌보고 있던 유우 석(柳愚錫)·유관순(柳寬順)의 두 동생 관복(寬福)·관 석(寬錫)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1923년경 유우석과 혼인해 1925년 첫 아들을 낳으며 혼인신고를 했다. 그는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두 시동생 관복· 관석, 세 아들 제충(濟忠)·제덕(濟德)·제인(濟仁)을 양 육했다. 조화벽은 일상과 가정을 돌보면서, 동시에 왕 성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원산여자기독청년회, 원산 해원 상구회에 참여하였다. 아울러 공주 영명학교는 물 론, 서울 배화여학교, 원산 진성여학교, 양양 정명학 교 등에서 열성적으로 후진을 양성했다. 1990년 정부는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 서했다. 김향화, 수원 기생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다 수원에서는 김향화가 기생조합의 선두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김향화는 기명(妓名)으로, 행화(杏 花)로 불리기도 했다. 본명은 김순이(金順伊)였다. 1897년 7월 서울에서 김인영(金仁永)과 홍금봉(洪今 鳳)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으나 일찍 수원으로 이사했다. 1918년 발간된 『조선미인보감』에 실린 기생 김향 화 소개 글과 사진(한국역사연구회 제공 3·1운동 당시 사용한 태극기 (안성 3·1운동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