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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 • 한국광복군 창설 63 피해졌다. 편입된 조선의용대는 제1지대가 되어 충 칭에 주둔하였다. 종전의 제1·제2·제5지대를 통합한 제2지대가 편성되어 시안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안휘성(安徽省) 부양(埠陽)에서 활동하던 징모(徵募) 제6분처가 발전하여 제3지대가 성립되었다. 이 3개 지대는 일제 패망 때까지 유지되었던 광복군의 기본 적인 단위부대였다. 병력 모집 및 선전 활동 한국광복군은 창설 초기부터 병력을 모집하기 위 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점 령하고 있던 화북 지방에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 광복군은 이들을 대상으로 적지 않은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아울러 1944년 이후 학병(學 兵)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온 한인 청년 수십 명이 일 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와 같이 적극적인 병력 모집 활동 결과 창설 당 시 수십 명에 불과하던 광복군은 1945년 8월이 되 자 1천 명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모집된 인원들의 훈련을 위해 시안에서는 중 국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안 휘성 린촨(臨川)에서는 한국광복훈련반을 설치하고, 모집된 청년들을 군사 초급간부로 양성하였다. 광복군은 선전활동을 중시하였다. 광복군이 국제 적인 지위를 얻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 여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선전활동이 대단히 중요 하였다. 광복군은 충칭방송국을 통해 선전활동을 수 행하였다. 아울러 충칭방송국을 통해 광복군에 대한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였다. 그밖에도 일본 군에 대한 반일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고 기관지 『광 복』을 발행하여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독립운동 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인도 · 버마에 공작대 파견 광복군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인도-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영국군 과 협동하여 대일전을 수행하였다. 광복군은 인도 주둔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1943년 8월 광복군 대 원으로 구성된 ‘인면전구공작대’를 파견하였다. 롤랜드 C. 베이컨 대위,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원, 도야전방 송부대 장교의 단체사진 (국가보훈부 제공) 독수리 작전을 위한 한국광복군 대원들의 무선교신 훈련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