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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양기탁 선생 63 미국 일본 방문, 서구문명에 눈 떠 1895년 12월부터 1897년 3월까지 미국 인 게일(Gale.J.S, 奇一) 박사가 『한영자전(韓 英字典)』을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1898년에 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부총무장(副總務 長)급으로 적극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출옥 후 일본 나가사키(長岐)를 거쳐 미국에 건너가 3년간 있으면서 견문을 넓힌 후 33세 때 귀국했다. 1902년 이상재·민영환·이준·이상설 등과 함께 개혁당을 조직하여 대혁신을 추진하다 피체되었으며, 출옥 후에는 한때 한성(漢城) 전기회사의 사무원으로 취직하여 근무했다. 1904년 3월 대한제국 황실의 외교 담당부 서인 궁내부 예식원(禮式院)의 영어통역관에 임명되었으며,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 제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 는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에 가담하였다. 보 안회가 해산 당하자 그 후속단체인 대한협동 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지방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구국계몽운동 전개 그는 한국인의 민족의지를 세계만방에 알 리고 외세의 침략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내탕금(內帑金)과 이용익(李容翊)·민영환 등 의 자금 지원을 받아 영국 데일리 뉴스(THE DAILY NEWS) 임시특파원인 배설[裵說] (Ernest T. Bethell, 1872~1909)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총무가 되어 1904년 7월 18일 『대 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였다. 처음에는 1896년 『독립신문』의 전례를 따 구 대한매일신보 사옥 전경(1990년대). 현재는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인 ‘딜쿠샤(Dilkusha)’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