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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장석천(張錫天) 선생 63 올라온 강영석은 서울의 청년운동 조직인 중 앙청년동맹원들의 지원을 받아 서울지역의 학생 시위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11월 17일 장석천이 서울로 올라온 뒤에 시위방식을 두 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결국 학생들을 동원 한 시위운동과 격문살포를 동시에 추진하기 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에 차재정·곽현 등은 격문 제작에 책임을 지기로 하고, 장석천과 황태성 등은 시내 각 중등학교 학생들의 동 원을 담당하기로 했다. 장석천은 12월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내 용과 항일투쟁 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2만여 장을 인쇄하여 전국에 발송하다가 경찰에 체 포되고 말았다.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 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보안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다음해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 정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자마자 노동조합 조직에 나서 그러나 1931년 12월 출옥하자마자 사회 운동을 재개하고자, 전남청년동맹 상임위원 을 지낸 바 있던 유혁을 찾아가 앞으로의 일 을 상의했다. 1932년 3월 초순에 좌익관련 서적을 취급하던 민중서원 점원 권태석의 소 개로 행정학회인쇄소, 조선제사주식회사, 선 일지물주식회사에 다니는 직공 정태익·박영 환·신광옥 등을 소개받았다. 노동조합을 조 직하는 동시에 확고한 결사단체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하지만 노동조합 결성 계획은 경찰의 검 문·검색이 강화되면서 발각되고 말았다. 당 시 총독부 경찰은 1932년 9월 4일 국제노동 절에 맞춰 지방의 항일인사들이 서울로 잠입 하여 공장 노동자들과 연계하려 한다는 첩보 를 입수하고 검문을 강화했다. 그 와중에 결 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경찰에 체포되고 말 았다. 1932년 10월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취 조받은 뒤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1932년 12월 24일 징역 2년형 판결을 받았다. 그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3년 4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후 만성 위 장병이 심해지자 형무소 측은 11월 7일 보 석 출감시켰다. 그러나 출옥한 뒤, 끝내 고문 과 옥고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광주 자 택에서 치료받다가 1935년 10월 18일 순국 하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