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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26년 3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3월의 독립운동 름을 쓰고 동참을 서약했다. 3월 1일 아침 호수돈여고보 학생들은 식당에서 기도를 마친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하지만 교 장의 제지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일제 기마부 대가 학교 정문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3월 3일 아침 조화벽은 학교 동기들과 함께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헌병대 앞에서 보란 듯 태극기를 흔들며 소 리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가 되자 송도 고등보통학교 등 개성 읍내 중등학교 학생들과 시민 들이 봇물처럼 몰려들며 합류했다. 1,000~2,000명 의 군중은 읍내 일대를 행진하며 ‘독립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쳤다. 학생들이 헌병대 운동장으로 연행되 자 이를 보고 분노한 만세군중들이 헌병대 정문을 밀치고 들어와 거세게 항의했다. 헌병대는 학생들을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 생들은 기숙사에 갇혔다. 3월 5일 만세운동 저지를 위해 휴교명령이 내려지면서 학생들은 귀향해야만 했다. 3월 말 조화벽도 본가인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 다. 그러나 빈손은 아니었다. 그의 버선 속에는 독립 선언서가 있었다. 기차를 타고 원산을 거쳐 속초 대 포항에 도착했을 때 조선총독부 경찰에 다른 소지품 을 압수당했지만, 독립선언서만큼은 지킬 수 있었 다. 조화벽은 독립선언서를 감리교회 청년부원이자 면사무소 급사로 있던 김필선(金弼善)에게 전달했 다. 김필선은 동창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조화벽이 전달한 독립선언서가 양양 3·1운동을 견 인한 것이다. 임천리 최인식(崔寅植) 등과 뜻을 합해 준비 중이 었던 만세운동은 4월 3일 저녁 양양군수 이동혁(李 東赫)의 급습으로 22명이 체포되고 370여 매의 태 극기를 압수당하는 등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피신 했던 김필선, 김재구, 최인식 등 주도자들은 만세운 동 실행에 박차를 가했다. 이튿날인 4월 4일 아침 양 양 읍내로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조화벽도 양양읍 장터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 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만세군중은 전날 연행된 이 자혜의원으로 쓰인 수원 행궁의 봉수당(경기일보 제공) 수원 기생 만세운동 공판을 보도한  『매일신보』의 기사(1919.6.20) (국립중앙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