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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24년 5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원과 의성 김씨 문중, 이상룡, 류인식 집안의 재산 등이 동원되었다. 특히 김대락과 그의 아들 형식과 김후병, 하중환의 기여도 컸다. 협동학교는 내앞[川前]마을의 가산서당(현 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내에 복원)을 임 시 교사로 사용하다가, 김대락의 저택(55칸) 으로 옮겼고, 1913년 한들[大坪]로 옮겨 정 재 류치명의 종택을 교사로 이용하였다. 학 교의 이름은 “나라의 지향은 동국이요, 향토 의 지향은 안동이며, 면의 지향은 임동”이므 로 ‘동(東)’자를 따고, 안동군의 동쪽에 위치 한 7개면이 힘을 합쳐 설립한 것이므로 ‘협 (協)’자를 따서 협동학교라 정하였다. 협동학교의 교육과정은 3년제 중등과정이 었는데, 초등과도 있었으며, 본과 진학을 위 한 예비과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과내 용은 신교육을 위주로 하되 서구의 신학문도 수용하여 가르쳤다. 협동학교는 1908년부터 1918년까지 모두 8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 출하였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만주(중국 동 북지방)로 망명하거나 고향에서 전개된 3 · 1 운동이나 신간회 지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 는 등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개교 당시 류인식은 교무주임을 자청하였 고, 교장으로는 의성 김씨 종손인 김병식을, 학감으로는 종형인 류창식을 추대하였다. 교 사진은 류인식이나 김동삼, 김형식 등 지역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신민회(新民會) 가 추천하여 서울에서 내려 보낸 인물들로 구성하였다. 협동학교의 설립과정이나 운영 에 있어서 신민회가 깊이 개입되어 있는 사 실은, 향후 안동인의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 전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서간도 망명과 귀국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류인식은 발해의 옛 땅이 우리들이 돌아갈 곳이라고 판단하고 만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만주 망명 협동학교가 처음 세워진 안동 내앞마을 전경(국가보훈부 제공) 협동학교 교사로 사용한 가산서당 건물(복원)